에스떼야 - 또레스 델 리오
오늘 아침도 뤼노의 '불량 순례자'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짐을 챙기며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것이다.
'올라, 깨딸?'
'부에노스 디아스, 산후안'
'올라...'
'부에노스 디아스'는 아침인사.
주방으로 내려가조니 사무엘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우유와 씨리얼이 남아 있으니 먹으라며 준다.
여럿이 있으면 작은 씨리얼을 사서 나눠먹어도 괜찮겠다.
알베르게를 나와 에스떼야를 가로질렀다.
어제는 몰랐는데 에스떼야는 마을이라기보다는 작은 도시규모였다.
도시를 빠져나오자마자 얼마 안가 이라체가 나왔다.
와인이 나온다는 이라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조금 초라하다고 해야 하나, 주위에 뤼노가 좋아하는 자판기도 있고 약수터 느낌이 나기도 했다.
와인이 나온다는 와인 꼭지를 돌렸지만 와인은 나오지 않았다.
먼저 와있던 스페인 그룹도 못 마시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제한 급주를 하나..
그냥 기념사진만 찍고 가는 수밖에.
그런데 뤼노가 맛은 볼 수 있다고 했다.
꼭지를 한참 붙들고 있더니 갑자기 '휙-' 내렸다. 그러자 '똑똑..' 몇 방울이 떨어졌다.
그렇게 쥐어짜듯해서 맛만 보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뤼노가 앞서가기 시작했다.
에이~ 입맛만 버렸네....
공짜 와인이 없었지만, 항상 와인 타령을 하던 사무엘은 그리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억으로는 이라체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까미노가 두 갈래로 나뉜다.
이라체에서 오던 방향을 따라가는 조금 빠른 길과 우측으로 조금 돌아가는 길.
요한이 피어싱을 한 입술로 더듬거리며 조금 돌아가지만 우측 길로 가는 게 풍경이 더 좋다고 했다.
스페인 그룹이 출발하고 고민할 것도 없이 그들을 따라 사무엘과 우측 길을 택했다.
사무엘은 22살인가, 23살인가, 20대 초반이라고 했는데, 한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비닐봉지로 둘둘만 아이패드를 들고 다녔다.
비가 올 때 좋다며 비닐봉지에 싸들고 다녔고 멋진 풍경이나 재미난 것이 나오면 아이패드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스위스에는 이렇게 찰진 흙이 드물다며 이런 땅이 좋단다.
어찌나 찰진지 하늘에서 비라도 내리고 나면 신발에 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발이 엄청 무거워질 것만 같았다.
휘파람도 불고 노래도 부르며(무표정한 얼굴로) 건들건들 걸었다.
스위스를 떠나면서부터는 가끔 하던 마약도 끊었다고(스위스에서는 마약이 허용되는가 보다).
어느 집 마당에서 개가 큰소리로 짖었다.
그 소리가 마치 '걸어 걸어 걸어' 하는 것 같다. '웍웍웍!!'
사무엘이 줄이 묶여있는지 확인하더니 다가가서 투우사 리마리오처럼 두 손을 치켜올렸다.
그러면 개가 더 사납게 짖어댔다. 줄을 끊고 달려들 것처럼.
하지 말라고 해도 재미로 그러는지 개에게 무슨 안 좋은 억하심정이라도 있는지,
걷다가 담장 안으로 개가 보이면 나를 한번 돌아보고는 손을 치켜올리려고 했다.
'제발 하지 마' 하면 손을 내렸고, 가만히 있으면 손을 추켜올려 개의 성질을 돋구었다.
대나무로 때리는 시늉까지 했다.
어째 조금 '돌아이' 같았다.
걷는 게 참 느린 것 같지만 그 걸음에도 가속도가 있어서 속도를 늦추기가 쉽지 않았다.
잠깐 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속도에 밀려 잠시 배낭을 벗어놓고 쉬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른 순례자의 페이스에 맞추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된다.
도시를 벗어날 때 깜빡 잊고 점심거리를 사지 않았는데, 마침 지나가던 작은 마을에서 "빵-빵-" 거리며 자동차에 식료품을 싣고 파는 자동차 가게를 만났다.
자동차에 온갖 부식거리며 빵을 싣고 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장 보러 나온 동네 아줌마들 틈에 끼어 빵도 사고 과일도 샀다.
빵이 크다고 했더니 반을 잘라 준다.
사무엘과 함께 동네의 작은 쉼터에 짐을 풀고 간식을 먹었다.
스페인 그룹도 쉬고 있었다.
주로 걷기만 하니 쉴 때 가벼운 상체운동을 하는 것도 좋은데,
요한이 나무에 매달렸다.
매달리더니 이리저리 옮겨간다.
보고 있던 후안호가 함께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후안호는 50대로 보였는데 요한보다도 나무를 더 잘 타는 것 같았다.
베아가 '멍키 멍키, 로꼬 멍키'라고 했다.
'로꼬' 란 스페인어로 '미친'이라는 뜻.
아버지뻘 되는 후안호에게 '원숭이가 미쳤네' 라니.. 정말 싸가지가 없었다.
물론 베아는 '정말 원숭이 같아, 대단한데'라는 의미로 한 말이겠지만.
신발도 벗고 느긋하게 간식을 먹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이곳 고양이들은 사람을 잘 따르고 순했다.
사무엘이 '가또 컴온 가또..' 한다.
'가또'는 스페인어로 고양이.
한국의 길거리 고양이들이 살기 남기 위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는 반면에,
스페인 고양이들은 집고양이처럼 어슬렁어슬렁 사람 주위를 배회하며 느긋하게 음식을 얻어먹었다.
아, 고양이마저도..
스페인 그룹이 먼저 출발하고, 잠시 후 사무엘과 일어섰다.
그리고 사무엘은 건들건들 앞서갔다.
이날 묵으려고 생각했던 마을(로스 아르고스)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어정쩡했다.
마침 2시가 막 넘은 시간이라 가게도 모두 문을 닫아버렸다.
알베르게도 문을 열지 않았고(이런 망할 놈의 무니씨팔 알베르게 같으니라고!),
너무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순례자는커녕 고양이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안내지를 보니 로스 아르고스의 무니시팔 알베르게는 봄부터 10월까지만 운영된다고 적혀 있었다.
뤼노와 사무엘도 보이지 않았고,그렇다고 다음 마을까지 가기는 정보도 부족하고.
씨에스타에 빠진 마을이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마을 초입에 사설 알베르게가 있는데 왠지 '무니시팔' 알베르게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내키지 않았고
얼마 안 되는 거리였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도 정말 싫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바나나만 까먹고 있었는데 때마침 스페인 무적함대 그룹이 지나갔다.
피어싱 요한이 약 8km 만 더 가면 '또레스 델 리오'에 알베르게가 열려있고 자기들도 그리로 간다고 했다.
이미 21km 나 걸었고 8km면 약 2시간 거리인데..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배낭을 둘러맸다.
겨우 몇 백 미터만 되돌아가면 열려있는 사설알베르게를 놔두고 2시간 거리를 더 걷기로 했다.
방향에도 관성이 있나 보다.
점심도 대강 때우고, 머물려고 했던 마을에서 머물지 못하고 걸었던 터라 힘들었다.
또레스 델 리오에 도착했다.
알베르게가 어딘가 하며 두리번두리번 걷고 있었는데
먼저 도착한 뤼노와 스페인 그룹이 알베르게의 2층에서,
지쳐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올라-", "깨딸?", "부에노"
하며 환영해주었다.
지친 몸이 금방 회복되었다.
사설 알베르게가 내키지 않아 8km를 더 걸어왔는데 사설 알베르게다.
스탬프를 받고 2층으로 올라갔더니 작은 방이 뤼노와 스페인 그룹으로 북적거렸다.
뤼노 침대의 2층은 비었지만 좁은 방에 나까지 들어가 버리면 그야말로 시장통이 따로 없을 것 같아
'어쩌지..' 하고 우물쭈물했더니 젊은 주인이 흔쾌히 옆방을 열어주고 스팀도 틀어주었다.
오늘은.... 독방이다!
2층 침대 3,4개가 놓인 방이 무척 아늑했다.
2층이 아닌 1층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2층에 자리를 잡았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1층 침대에 누우면 낯선 외국인들과 눈 마주치기가 어색해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 2층을 선택했었다.
2층에 올라가 누우면 그 순간만은 혼자가 될 수 있었으니까.
오늘은 1층에 자리를 잡았다.
1층에 누워보니 2층 침대에 천장이 막혀 조금 갑갑했지만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7유로로 가격도 비싸지 않고 깨끗해 '사설 알베르게도 나쁘지 않네'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대강 짐을 여기저기 마구 펼쳐 늘어놓고 옆방으로 갔다.
물리치료사인 홀리안이 일행들의 발을 치료하고 있었다.
특히 뤼노는 발이 약해 치료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뤼노가 치료를 끝내고 저녁을 먹자고 했다.
처음에 뤼노가 주사기를 사용했을 때 낯설었는데, 물집이 심한 사람들은 주사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주사기로 진물을 뽑아내고 소독을 한 후에 밴드를 꼼꼼하게 발라준다.
확실히 전문가의 손길이 닿으니 깔끔하고 깨끗하게 치료가 되었다.
상처부위의 치료와 예방을 위해 바르는 밴드가 특이했다.
'꼼삐드'.
피부톤의 반투명한, 약간 도톰한 밴드로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 상처에 대고 비벼가며 마찰열을 주면 굴곡에 맞게 접착되었다.
'쎄컨드스킨' 이라고도 한다더니 과연 완성품은 피부가 약간 도톰 해진듯해 보였다.
물에 닿아도 괜찮단다.
뤼노의 치료에만 20여분 가까이 걸렸다.
홀리안이 나도 치료해주겠다고 했지만 주사기가 무서워 사양했다... 는 아니고 물집이 심하지 않았고,
치료하는 그의 수고가 너무 많아 보여 괜찮다고 했다.
주사기는 안 무섭다.
나는 양쪽 발의 새끼발가락과 약지 발가락에 물집이 있었는데도 걸을 때면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뤼노는 어땠을까?
발가락은 물론 뒤꿈치와 발의 측면에도 물집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픈 내색 없이 잘도 걸었다.
나는 간단하게 물집에 실을 꿰어놓았는데, 매일 걷다 보니 쉽게 없어지지는 않았다.
홀리안의 발도 그렇고, 싸가지 베아의 발도 뤼노처럼 물집이 심했다.
치료하는 걸 유심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베아가 작은 꼼삐드밴드 하나를 주었다.
'이게 꼼삐드야' 하며.
'오올라아앙'과 '올ㄹ' 로 상처를 주더니..
상처 주고 꼼삐드 주는구나.
'꼼삐드'는 받아주었다.
"그라시아스!"
물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발이 넉넉해야 한다.
울퉁불퉁한 길이 많은 까미노에서는 바닥이 단단하고 두꺼운 신발이 좋고,
피부가 약한 사람은 출발 전 발에 바세린로션을 발라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길을 걸을 때 신발끈을 느슨하게 풀어주면 발에 무리가 덜 간다.
중간중간 쉴 때는 귀찮더라도 신발을 벗어 통풍을 해주고 땀을 말리는 것이 좋다.
치료를 끝낸 뤼노가 내방에 들어와 보더니 부러워하는 눈치다.
'이따가 짐을 이리로 옮겨도 될까?' 하고 물었다.
'음.... 남자랑 한방에 단둘이 머무는 것은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는데.. '
잠깐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방주인으로서 흔쾌히 승낙을 해줬다.
이곳은 1층에 작은 띠엔다(가게)를 겸하고 있었다.
작지만 깨끗한 주방도 있으며 샤워시설도 아주 좋았다.
집에서보다 어째 더 잘 씻는다.
매일 샤워라니, 한국에서는 당치도 않은 일이다. 매일 머리 감기도 귀찮아하지 않았나.
씻고 나왔더니 스페인 그룹은 벌써 저녁 준비를 다 끝내갔다.
베이컨 같은 걸 굽고 계란 프라이를 하고, 무슨 소파(스페인어로 '수프')에다 스파게티 그리고 와인.
나는 뤼노와 같이 저녁을 해 먹기로 했는데, 알베르게는 가게를 겸하고 있었지만 물건이 많지 않아 딱히 해먹을 만한 게 없었다.
뤼노의 스파게티 국수를 삶고 내가 정어리 통조림을 꺼냈다.
스페인팀이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 그리고 소파를 나눠주었다.
'뽀요(닭)소파'는 멀건 국물에 잘게 부순 라면을 넣어 끓인 것 같았는데 입맛에 아주 잘 맞아 이후로 자주 해 먹었다.
스파게티 국수에 정어리 통조림. 어떻게 먹을까?
뤼노가 그냥 정어리 통조림을 스파게티면 위에 부었다.
정어리 스파게티라니, 아끼는 것도 좋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너무 싱거워 주인에게 소금 있느냐고 물었다.
'쌀...' 했더니(소금은 '쌀' , '쏠' 은 태양)
비질을 하던 젊은 주인이 갑자기 차렷 자세를 취하며 큰소리로 "씨, 쎄뇨 - 르!" 했다.
깜짝 놀랐지만 재미있다.
주인은 스페인 사람이라기보다는 남미 사람 같아 보였다.
마을 이름에도 '리오' 가 들어있어서 더욱 그랬는데, 보이긴 무뚝뚝해 보여도 하는 건 귀여웠다.
주인이 갖다 준 소금을 처먹으니, 시장이 반찬이라고 먹을만했다.
그런데 뤼노, 정말 프랑스 사람 맞아?
이제 조금 스페인 그룹 사람들이 분간이 되기 시작했다.
20대의 요한과 베아, 30대의 젊은 후안호, 50대의 로꼬 멍키 후안호, 순박한 죠셉과 물리치료사홀리안이다.
이름도 낯설고 서로 비슷한 것 같더니만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박한 죠셉 아저씨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전날 보았던 것이다.
'보따'라는 전통 와인 주머니로, 입구가 물총처럼 생겨서 입에 대고 보따를 누르면 와인이 발사된다.
('보따' 는 가죽술병과 장화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알베르게에 신발 두는 곳에 '보따' 라고 씌어있다.
'장화 신은 고양이' = '가또 꼰 보따스' )
그러면 보따를 점점 멀리해 묘기를 부리듯 와인을 받아마시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중간에 멈추면 아까운 와인을 옷에 뿌리게 된다.
스페인팀이 다들 돌려가면서 한방씩 와인을 마시더니, 내게 권했다.
호기심에 받아 들고는 발사!
흘리지 않고 잘 받아 마시고 보따를 내려놓으니,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두가 동시에(마치 아이돌 그룹 인사하듯) '부에노-!' 하며 박수를 쳐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재미있고 귀엽던지.
초라한 먹거리였지만 풍성한 저녁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아무리 그래도 정어리 스파게티라니....
정어리는 '살디나'
다음날 먹으려고 빵을 고르자 주인이 '내일 아침에 신선한 빵이 온다'며 내일 사란다.
뤼노가 1층에서 '위피' 가 된다며 휴대폰을 빌려갔다.
남자 둘만 방에 있는 게 이상해서인지, 짐을 옮기는 게 귀찮아서인지, 스페인 그룹과 어울리는 게 좋아서 그러는지 뤼노가 내방으로 옮기지 않아 홀가분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나저나 사무엘은 어디에서 와인 타령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