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레스 델 리오 - 산토도밍고
창밖을 보니 흐리지 않았다.
하늘이 파란 게 구름 한 점 없었다.
스팀 위에 널어놓았던 빨래도 잘 말랐다.
오늘도 불량 순례자.
스페인 그룹은 벌써 알베르게를 나서고 있었다.
알베르게 1층에서 뤼노와 까페 꼰 레체를 시켜 빵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달걀을 삶아 하나씩 먹고 남은 것은 쌀(소금)과 함께 배낭에 챙겨 넣고 출발.
걷기 시작한 뒤로 처음으로 구름 한 점 없는 아침이다.
잃어버렸던 그림자를 찾았다.
넓은 대지의 끝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이 우리의 그림자를 아주 길게 만들어버렸다.
도심 속에서는 접할 수 없을뿐더러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거의 볼 수 없는 우리로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그림자가 저만치 커져있는 게 생소했다.
11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기온은 들쑥날쑥이었다.
아침에 덥기도 하고 그러다가 흐려지면 쌀쌀해지기도 했다.
모처럼 외투를 벗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걸었다.
포도밭도 보이고 올리브 밭도 보였다.
뤼노가 ‘나는 올리브나무를 사랑해’라고 했다.
영화에서나 봤지, 올리브나무를 실제로 보기는 처음.
가지가 보통의 나무들처럼 단단한게 아니라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줄기 같은 가지를 하고 있었다.
윤기 나는 잎사귀를 보니 올리브유가 떠올랐다.
까만 열매가 달려있는데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단다.
뤼노가 올리브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쓰다듬었다.
장말 올리브나무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조금 황량한 벌판 멀리 마을이 아련하게 보였다.
풍경만 보면 아스라이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기대했던 풍경 중의 하나.
이런 풍경을 기대했었지...
아무도 없는 벌판을 뤼노와 나, 둘이서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뤼노가 한 나무 밑에 멈추섰다.
잠깐 기다려보라며 나무 밑으로 가더니 무얼 찾는다.
그러더니 돌로 두드려 깨어서 내게 준다.
‘아몬드’
나무 밑에 아몬드가 떨어져 있었다.
아, 아몬드가 이렇게 나무에서 열리는구나.
아몬드를 까먹고, 또 까서 주머니를 채우고.
첫날 오리손에서 뤼노가 내게 아몬드 두 알을 건네주었었는데
그럼 그때도...
심심풀이 땅콩이라더니, 심심풀이 아몬드로 조금 지루한 걸음에 '오도독' 하고 고소한 재미를 준다.
그래, 지루함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니 죠셉과 홀리안이 쉬고 있었다.
홀리안은 처음 봤을 때 농부인 줄 알았다.
우비를 입고 밭에 서 있는 게 영락없는 농부였다.
그는 조금 개인적이다.
머물 때는 함께지만 걸을 때면 무리 지어 걷지 않고 항상 쳐지거나 앞서가 혼자 걷는다.
홀리안은 자신만의 '홀리'한 세계를 갖고 있는 듯했다.
프리랜서 사진작가라며,
커다란 카메라가 있지만 여행용으로는 이게 최고라며 자신의 작은 카메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나마 쉬운 영어로 설명을 해줬지만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열심히 설명을 하는 홀리안 때문에 관심 있는 척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죠셉도, 뤼노의 반응도 비슷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별 관심 없는 우리에게 나름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인상 좋은 시골 아저씨 같은 죠셉은 호두 까는 법을 알려준다.
단단한 바닥에 호두알을 놓고 그위에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펴서 올려놓고
다른 손 주먹으로 탁 내려치면, 호두가 경쾌하게 부서졌다.
호두까기 죠셉.
죠셉은 영어를 나보다 못했다. 거의 못한다.
홀리안은 나와 비슷한 ‘귀모자급 이다.
다가가기도 쉽고 참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죠셉이 먼저 출발을 하고,
뤼노가 다시 앞서갔다.
나는 뒤쳐졌다.. 가 아니라 천천히 걸었다.
홀리안은 나보다 더 뒤에서 걸었다.
길었던 그림자도 줄어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코디언처럼 뭉쳤다 늘어났다 하며 풍작 풍작....
까미노는 도로변을 따라 이어지기도 했다.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멀리 비아나라는 마을이 보였다.
비아나에 도착했다.
씨에스타 전이라 그런지 거리에 제법 사람들이 보였다.
마을마다 있는 성당 앞 작은 광장에 배낭을 내려놓고 볕이 좋아 신발을 벗고 앉았다.
스페인 그룹에는 부자지간이 있었는데 바로 후안호와 요한이다.
아버지 후안호와 피어싱을 한 아들 요한.
함께 나무를 타던 이들이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까미노라니, 엄마와 함께라면 몰라도 내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너무 부럽다.
전형적인 무뚝뚝, 왕권위적인 한국 표준 아버지(아닌가?).
그런 아버지와의 까미노는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다.
후안호가 다가와 물었다.
"올라- 깨딸?"
"부엔"
말랐지만 단단해 보이는 후안호.
나무에 잘 매달려 싸가지 베아가 '로꼬 멍키(미친 원숭이)'라고 했었는데..
싸가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만큼 격이 없이 대한다는 것이겠지.
바나나를 먹고 싶었지만 없어서 사과를 나눠먹었다.
후안호는 내게'죠셉'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죠셉은 처음에는 나보다 앞서갔으나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뒤로 처졌다.
곧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줬더니 안심한다.
길동무들끼리 안부를 물으며 염려해주는 모습이 부러웠다.
혹시라도 누가 나를 생각하며 ‘상한이 봤어?’ 하고 물어줄까?
외국인들 틈에 끼어있다 보면 가끔 외톨이가 된 느낌도 들고,
또 지들끼리 얘기할 때면 우등생 틈에 낀 공부 못하는 학생이 된듯하기도 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뤼노가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선물이라며 주사기 하나를 내밀었다.
'포 블리스터'
주사기를 사면서 내 것도 하나 산 모양이다.
주사기도 묶음으로 샀을까.
물집에 유용할 것이라며 건네주는 뤼노.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도 있구나.
더구나 짠돌이 뤼노가 주사기까지 주며 나를 생각해주었다는 게...
스산했던 가슴에 따뜻한 백신 한방.
답례로 사과한개.
‘갖고 다니다가 혹시 오해라도 받으면 어쩌지..’라는 별 쓸데없는 걱정도 잠시 해봤다.
다시 뤼노와 함께 걷기 시작.
뤼노가 지나가는 순례자 둘을 보며 '프랑스 사람 같다' 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프랑스 사람인데 뤼노는 '까미노에서까지 프랑스 사람하고 어울리고 싶지는 않다' 고 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었는데 조금씩 한국사람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뤼노와 함께라 덜했지만 혼자였으면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비아나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학교가 나온다.
귀여운 아이들이 우리들을 구경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구경하고.
아이들이 담장 밑에 버려진 생수통을 가리키며
'아저씨, 밑에 물병 좀 집어 주세요' 하니
'안돼, 저건 더러운 거야'라고 뤼노가 대답해준다.
그러고 보니 내 물병은 들고 다닌 지 벌써 1주일이 넘었다.
파리에서 비아리츠 올 때 이용했던 저가항공 이지젯에서 산 1유로짜리 고가의 생수통이다.
곳곳에 식수가 있어 물을 살 필요도 없었고 또 물맛도 좋았다.
마을을 빠져나와 길 옆 포도밭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포도밭 위의 점심식사.
막 자리를 잡고 먹으려는데 죠셉이 '부엔 뿌로배쵸-' 하며 지나갔다.
우리도 '올라, 부엔 까미노-'
바게트에 참치를 넣어 먹고, 삶은 달걀을 까먹고, 후식으로 포도를 따먹고..
포도는 수확이 이미 끝난 뒤라 몇 개 안 달려 있었는데 알갱이는 작았지만 무척 달았다.
기름진 땅과 맑은 물, 뜨거운 태양과 농부의 수고가 만들어낸 달콤함이다.
자리를 정리하고 막 출발하는데 홀리안이 지나간다.
항상 싱글벙글 웃으며 ‘올라, 깨딸, 산환?’ 하며 말을 붙인다.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육교도 건너고
멀리 로그로뇨가 보였다.
오늘은 로그로뇨까지만.
빰쁠로냐 이후로 만나는 꽤 큰 도시다.
로그로뇨 도착 기념
알베르게는 경찰서 바로 옆에 있었다.
오늘은 독방이 아니라 다시 침대의 2층으로 올라갔다.
알베르게의 마당 한편에 신발을 세탁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있어 간단히 밑창에 묻은 흙을 씻어내고 말렸다.
마당에 앉아 쉬고 있으려니 사무엘이 '올라' 하며 들어왔다.
반가운 얼굴.
걸음이 빨라 우리보다 앞서갔으려니 했었는데,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전날 로스 아르고스에서 머물렀는데 한 미국인이 밤새 코를 골아댔다며 투덜거린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며
"히 워즈 어 테러리스트, 아메리칸 테러리스트. 쉣!"
라고 투덜댔다.
아메리칸 테러리스트라는 말이 참 낯설게 들렸다.
아메리칸 투어리스트라면 몰라도 아메리칸 테러리스트라니.
하긴 중립국인 스위스나, 미국이 우방이 아닌 다른 나라에게는 충분히 테러국가가 될 수도 있겠다.
같이 일했던 스리랑카 친구 모한도 미국보다 중국을 좋아했었다.
UN 도 싫어해서 한국인 사무총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곧이어 오바츠와 씨그릿도 들어온다.
그들도 밤새 테러를 당했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로그로뇨 알베르게에는 주방은 있지만 조리기구라고는 전자레인지 밖에 없어서 음식을 해 먹기가 마땅치 않았다.
모처럼, 론세스바예스 이후로 '메뉴 델 디아'를 먹겠구나 싶었는데,
뤼노가 이곳엔 까르푸가 있으니 가자고 한다.
프랑스인과는 거리를 두면서 프랑스 마트와는 아주 가까웠다.
'메뉴 델 디아'는 까르푸 건너갔다.
로그로뇨를 돌아다니며 성당도 둘러보고 시내 구경을 하다가 까르푸에 가서 저녁거리를 샀다.
역시 무조건 싸고 양 많은 놈으로.
바게뜨빵을 사고, 비스킷 묶음상품, 그리고 참치캔 묶음, 과일.. 등등을 사고
전자레인지가 있으니 '냉동 오믈렛을 사자' 고 했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주방에 들어가니 사무엘과 독일 부부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오늘은 각자 자기 취향대로.
사무엘은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다 마치지는 못했지만 요리를 공부했다는데 어째 뭔가 어설프다.
큰 컵에 토마토를 썰어 넣고 치즈도 넣고 참치도 넣고 마요네즈를 듬뿍 쳐 섞은 후, 빵에 넣어 먹었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잊고 있던 김치 생각이 절로 났다. 느끼해....
전에 빰쁠로냐에서는 아무도 먹지 않는 스파게티를 만들더니
혹시 사무엘은... 요리계의 테러리스트?
웬일로 무알콜 음료를 마시나 했더니 이곳은 금주다.
사무엘은 로스 아르고스에서 일본 사람과 묵었다며
"노 와잉가 아리마센, 노 와잉가 아리마센" 한다.
그리고 '기모노를 입고 걷는 순례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기모노를 입고?'
뤼노도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며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말은 너무 어렵단다.
사무엘은 발음이 재미난 지 ‘노와잉가아리마센 노와잉가아리마센..’ 을 반복했다.
'더 이상 포도주가 없나니'
그래, 오늘은 정말 포도주가 없다.
독일 부부 오바츠와 씨그릿도 저녁을 먹었다.
빵과 쏘세지와.. 그런데 오바츠가 마시고 있는 것은 맥주!?
“여기 금주라는데요”
“알아. 그래서 맥주야”
“금주라니까요.”
“그러니까 맥주라니까”
누가 독일 사람 아니랄까 봐...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 오바츠가 귀여운 한 마리 곰 같았다.
냉동 오믈렛은 밍밍한 게 입맛에 안 맞았다.
사무엘이 준 도넛으로 저녁식사를 마무리 했다.
스페인 그룹은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침대에 누워 낮에 적은 메모를 노트에 옮겨적고 있는데 싸가지 베아가 조가비를 가져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젊은 후안호가 조가비가 없는데 깜짝 선물을 해줄 거라며 고양이와 개를 그릴 수 있으면 그려달라고.
아니, 왜 나한테 그 어려운 걸 요구하는 거지?
안 그래도 재수 없는 게 그림까지 그려달라니, 그것도 울퉁불퉁한 조가비에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림을 그리거나 싸인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고양이 새끼 한 마리만 그려줬다.
예쁘게 굴었으면 개새끼도 한 마리 같이 그려줬을 텐데.
어쨌든 모두의 싸인이 들어간 조가비를 받고 기뻐하는 후안호를 보니 흐뭇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조가비를 달지 않고 올걸. 커다란 조가비를.
뤼노는 알베르게에 있겠다고 해서 혼자 밤거리로 나왔다.
로그로뇨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밤이라 나도 그들 틈에 자연스럽게 묻힌다.
세련됨 하고는 거리가 있지만 손때 묻은 오래된 것 특유의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다니다 죠셉과 홀리안을 마주쳤다.
홀리안이 멋진 야경사진을 찍었다며 보여준다.
과연 멋있었다(정말 사진작가인가?).
감탄하며 보고 있으니 홀리안이 뿌듯해한다.
죠셉은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다.
다양한 사람들이 까미노를 찾아와 혼자 걷기도, 무리 지어 걷기도, 단짝을 만들어 걷기도 한다.
홀리안과 죠셉은 잘 어울리는 단짝이었다.
성격이나 관심사가 조금 다르지만 연령도 비숫하고 두 사람 모두 순박하고 솔직했다.
내게는 단짝까지는 아니지만, 그리고 조금 짠돌이지만 뤼노가 있었다.
배낭 없이 가벼운 몸으로 걷는데도 발이 금세 피로해졌다.
뤼노가 있는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사무엘 무슨 생각해... 오늘 못 마신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