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소원

로그로뇨 - 나헤라

by 외투



"안녕 상한"

이제 뤼노의 발음은 거의 완벽했다.

베란다에서 내다보니 맑음.


오늘 아침도 사무엘이 나눠준 우유와 씨리얼로 먹었다.

누가 스위스 사람 아니랄까 봐 쵸코렛을 숟가락으로 잘게 쪼개 씨리얼에 섞어 먹었다.

사무엘은 주로 혼자였지만 우유와 씨리얼을 그냥 1통씩 사서 먹고 나머지는 나눠주던가 아니면 냉장고에 넣어버렸다.


8시쯤 알베르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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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과 홀리안이 보였다.

물리치료사 홀리안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죠셉은 스트레칭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어젯밤에 미처 가보지 못했던 도심으로 길이 이어졌다.


도시를 벗어나기 전 뤼노가 ‘먼저 갈게’ 하며 양해를 구했다.

상처투성이 발로 성큼성큼 앞서갔다.


"올라 부엔 까미노"


평일 아침이라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붐볐다.

사람들이 ‘올라’ ‘부에노스 디아스’ ‘부엔 까미노’ 인사를 했다.

일터로 출근하는 그들은 배낭 메고 까미노를 걷는 우리가 부럽겠지.

하지만 나는 일터로 나가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직장을 그만둔 지 이제 고작 한 달이 넘었고, 까미노를 걷고 있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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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3인방과 독일 부부가 같이 걷고 있다.

30대 후안호가 모두의 싸인이 담긴 조가비를 달고 있다.


도시를 벗어나면 곧 호수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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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아침 호숫가 주변으로 산책도 하고 달리기도 했다.

호수 주변으로 난 길이 참 걷기 좋다.



나의 소망


잘 걷던 베아가 발이 좋지 않은지 뒤로 처졌다.

처음에 비하면, 나와 뤼노에 대한 베아의 차별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상처는 아직 남아있었다.

철이 없는 건지, 아니면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건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차별을 해버리다니.

베아랑 마주치기 싫었지만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만나게 되니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베아를 피해 더 빨리 걸을 수도, 더 늦게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베아의 상태를 보아하니 잘 하면(?) 오늘은 같은 알베르게에서 머물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완득이'에서 '제발 담탱이 똥주를 죽여주세요' 하는 완득이의 기도처럼

'제발 베아의 발병이 심해지기를..'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더니 힘이 들었다.

고가다리를 건너 마침 쉴만한 장소가 나타났다.

앉아서 신발을 벗고 쉬는데 씨그릿과 오바츠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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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뒤를 따라 베아가 힘겹게 걸어왔다.


씨그릿과 오바츠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올라"


나를 보더니 따라서 신발을 벗었다.

그러더니 양말까지 벗는다.

이번엔 내가 따라서 양말을 벗고 발가락에 상쾌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물집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계속 양쪽 새끼 발가락에 두 개씩.

씨그릿과 오바츠의 발은 상처하나없이 깨끗했다.

비결을 물으니 넉넉하게 크고 바닥이 단단하고 두꺼운 신발이라고 했다.


베아는 일행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쉬지도 않고 우리를 지나쳐 서둘러갔다.


"올라 부엔 까미노..."


씨그릿에게 오렌지를 잘라 주었더니 '오- 프레쉬, 굿, 당케' 하며

신선하고 맛있다고 남편 오바츠에게 오렌지를 사잔다.

갈증도 시원하게 풀어주고 참 달았다.

부부는 이번에는 부르고스까지 걷고 내년에 다시 부르고스부터 걸을 예정이란다.

항상 넉넉한 웃음과 친절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두 사람.

덩치도 크고 연세도 좀 있었지만 꾸준하게 묵묵히 잘 걸었다.

부드럽고 든든했으며 온화하고 친절했다.

두 사람처럼 나이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씨그릿과 오바츠가 먼저 떠나고..

맨발에 와 닿는 따뜻한 햇살이 좋았다.


나바라떼에 도착하니 역시나 고요한 마을이다.

어쩌면 그렇게 거리에 사람들이 없는지.

교회의 문이 열려 있어 살짝 들어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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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다.

조용한 교회에 배낭을 내려놓고 둘러보았는데

금빛으로 장식된 내부가 화려하긴 한데... 위압적이고 권위적이라고 해야 하나,

정감 있는 스페인의 시골마을과는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고요한 교회에 앉아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늘도 쉬엄쉬엄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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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나와 역시나 텅 빈 골목길을 걸어 마을을 벗어나 걷고 있자니

어제 로그로뇨에서 처음 만났던 헤수스(스페인)가 지나간다.

아마도 로그로뇨부터 걷기 시작한 듯.

커다란 덩치에 걸맞게 씩씩하게 걸었다.

‘헤수스’는 우리말로 '예수'이다.

이곳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을 종종 사용하기도 하나보다.

축구를 좋아한다는 헤수스.

나도 축구를 좋아해 바르셀로나 팬이라고 했더니 인상을 쓰며


"노!!"


레알 마드리드의 써포터란다.

바르샤와 마드리드는 항상 선두 다툼을 벌이는 라이벌 중의 라이벌이다.

두 팀 간의 경기는 ‘엘 클라시코’ 라 불리며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최고의 볼거리를 선사한다.

수퍼스타 메시와 호날두로 알려져 있는 두 팀(지금은 호날두가 유벤투스로 옮겼다).

내가 바르샤의 ‘이니에스타’를 좋아한다고 하자, 라이벌이지만 헤수스도 최고라며 인정을 했다.

마드리드의 써포터이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싼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경기를 직접 보기는 힘들 정도로 인기가 많단다.

헤수스가 다시 앞서가고,

잔디밭이 있길래 자리를 펴고 앉아 보까디요를 만들어 먹었다.

이제는 그냥 길가에 앉아 만들어 먹는 게 자연스러웠다.

지나가던 요한의 아버지 후안호가 나를 보며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한다.

아마도 ‘자연을 벗 삼아 맛있게 먹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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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면 넓은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건물도 없는 땅에 포도나무밭이 끝도 없다.

스페인 땅이 참 넓다.

걸어도 걸어도 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의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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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산이 인상적인 나헤라.

막 다리를 건너 알베르게를 찾아가는데 사무엘이 샌들만 신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는 얼른 짐을 내려놓고 저녁 장 보러 가자며 발길을 돌려 알베르게로 안내한다.


나헤라의 알베르게는 기부제다.

첫 기부제 알베르게.

얼마를 낼까? 이게 은근히 신경 쓰이네.

아무도 보지 않으면 모를까 호스피탈레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안 낼 수는 없어 5유로를 넣었다.

기부제라기보다는 ‘감시제’ 같다.

내나 안내나... 내면 얼마나 내나...

뤼노는 냈을까, 냈다면 얼마를 냈을까?


뤼노는 예의 그 '발수술'중이었고, 옆에서 지켜보던 독일 청년은 역시나 ‘크레이지’를 남발하고 있었다.

자기는 치료 중이니 미안하다며, 사무엘과 나더러 장 보러 다녀오라고 했다.

미안하다니. 천만의 말씀.

미안할 일은 아니고... 뤼노의 실수였다.

식재료를 아끼지 않는 요리계의 테러리스트와 굶주린 투어리스트, 둘만 보내다니.


쵸코렛도 스위스 쵸코렛으로 사고, 비스킷도, 빵도 싸지 않은 걸로 샀다.

오렌지주스도 담고, 씨리얼도 담고, 우유도, 계란도 담았다.

포도주도 싸지 않은 것으로 고르고 토마토도 골랐다.

사무엘은 요리할 때 토마토소스를 쓰지 않고 직접 토마토를 썰어 사용했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사 온 것들을 늘어놓자

아니나 다를까,

삼겹살 사 오라고 보냈더니 꽃등심 사들고 온 자식 보듯 하는 표정으로

뤼노는 영수증을 보자고 했다.

24유로 정도. 나누니 1인당 8유로.

내 딴에는 많이 샀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짠돌이가 되었는지 생각보다는 덜 나왔다.

물론 뤼노에게는 최소 이틀 치의 식비였지만,

그래도 내일 아침거리까지 샀으니 괜찮다고 뤼노를 위로했다.

그렇게 해서 먹은 토마토 살사 소스 덮밥은

뤼노의 눈치 때문인지, 사무엘의 요리실력 때문인지 기억에도 잘 나지 않는 저녁이 되었다.


베아가 보이지 않아 '혹시나...' 했더니

잠시 후 요한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발 상태가 좋지 않아 요한과 함께 약국에 다녀온 것.

치료를 받고 돌아온 베아의 표정이 밝았다.

그만큼 내 마음도 어두워졌다.

완득이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나의 소망도 이뤄지지 않았다.

뤼노의 말에 의하면, 그동안 당연한 듯 홀리안이 치료를 해줬었는데

베아가 치료받는 걸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 홀리안이 치료해주기 싫어한다고.

그러고 보니 홀리안이 베아를 조금 멀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알베르게에는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헤럴드)도 계셨는데,

순례자인지는 모르겠다.


알베르게 한쪽 벽면에 까미노 전도가 붙어있었다.

내가 그동안 걸어온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내지만 보고 걸어왔는데, 이렇게 지도로 한눈에 보니 새로웠다.

생장이 여기였고, 이곳 나헤라는 여기고, 싼티아고가 여길 것이고... 피스테라는 여긴가..? 포루투갈길은 갈 수 있으려나....

'벌써 이만큼이나 왔나' 싶기도 하고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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