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헤라 - 산토도밍고
어제 먹고 남은 씨리얼과 쨈을 바른 빵, 계란 프라이, 그리고 오렌지 주스까지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안개가 살짝 끼었다.
붉은 동산을 넘어가 한참을 걸으니
안갯속 아스라이 아소프라가 나타났다.
아소프라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한 인상의 요한은 만나면 항상
"올라 산후안, 깨딸?"
하고 정겹게 말을 건넸다.
그리곤 내가 스페인어를 모르니 요한도 영어로 더듬더듬 이것저것 얘기를 해주었다(영어도 시원치 않았지만).
어눌한 말투의 영어가 더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요한을 처음 보았을 때, 입술에 피어싱을 했지만 워낙에 서글서글해서 부담을 주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존재감을 못 느낄 정도로 편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당연하게 요한이 베푼 친절을 누려온 것 같기도..
그만큼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의 편안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베아가 요한과 잘 붙어다녔나보다.
출발시간도 다르고 걷는 속도도 다르지만 나헤라의 다음 마을인 이곳에서 모두들 쉬면서 재정비를 했다.
홀리안과 사무엘을 제외하면 이날 이 구간을 걷던 거의 모든 사람이 모인 것 같았다.
간식도 나누고 사진도 찍고 서로 격려하며 즐거운 휴식을 맞보았다.
편안하고 유쾌하고 행복했던 순간.
휴식 중의 휴식 같았던 순간.
나와 뤼노, 그리고 헤수스 이렇게 셋은 모두 빡빡에다 파란 옷을 입고 있으니,
사람들이 블루스 브라더스라고 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정말 이곳이 유독 심한 건지, 아니면 재미로 만들어 놓았는지 '싸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하지 말라니까 왠지 더 하고 싶어 지네...
먼저 와서 쉬고 있던 사무엘이 표지판과 같은 포즈로 반짝 웃음을 주고는 다시 앞서갔다.
떠나오기 전 걱정 중의 하나가 화장실 문제였었지만
규칙적인 운동(걷기)과 휴식과 잠, 식사 그리고 많이 안정된 마음 때문인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배낭을 꾸려 놓으면 자연스레 화장실이 날 불렀다.
그리고 개운하게 좀 더 가벼운 몸으로 출발.
그래서 아침에 되도록 서두르지 않고 여유를 부렸다.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뭐.
골프장이 나오고... 몇몇은 골프장 안에 있는 ‘바르’ 로 들어갔다.
나는 뤼노를 따라 통과.
골프장 주위의 마을은 집들이 모두 새것이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마을 같았다.
경기가 좋지 않아 분양이 되지 않은 빌라단지.
획일적으로 생긴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스페인의 좋지 않은 경제상황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편치 않았다.
마을 한켠에 마련된 쉼터의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배낭을 열어 빵이며 과일을 꺼내는데 뭔가가 흥건했다.
꺼내보니 이런 젠장할, 덜 익은 삶은 계란이 터져버렸다.
아침에 남은 계란을 사무엘이 삶아 나눴는데...
결국 사무엘에게 테러를 당하고야 말았다.
계란으로 폭탄을 제조하다니. 스위스 테러리스트 사무엘.
반숙도 안된 계란이 터졌는데, 유럽인들이 그런 건지 뤼노만 그런 건지 아예 먹을 생각을 안 한다.
'날계란도 먹는데 뭐' 하며 몇 개를 들이마셨다.
씨그릿과 오바츠가 웃었다.
뤼노와 따뜻한 커피도 나눠 마시고 보까디요도 만들어 먹었다.
씨그릿과 오바츠도 옆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주로 씨그릿이 오바츠를 챙겨준다.
이것 먹으라 저것 먹으라.
그러면 오바츠는 묵묵히 받아먹었다.
챙겨주는 사람도, 받아먹는 사람도 행복해 보였다.
보는 사람도 행복했다.
행복을 전염시키는 사람들.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은데..
싼토도밍고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사무엘이 길 옆에 앉아있었다.
지그시 먼 곳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사무엘의 모습이 근사했다.
그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조금 더 가서 나도 쉴 겸 앉았다.
생각보다 이른 시각에 도착했기에,
남은 길을 아끼려고 앉아 있으려니 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지나갔다.
"올라?"
"깨딸?"
"부에노-"
"하우 아 유?"
어제 나헤라에서 처음 보았던 할아버지, 헤럴드도 지나간다.
'아, 까미노를 걷고 계시네..'
긴가민가 했더니, 많은 연세에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걷고 계셨다.
언뜻 봐도 70은 훌쩍 넘기셨을 것 같은데 대단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씨그릿과 오바츠도 지나간다.
씨그릿아줌마의 미소는 100만 유로짜리.
싼토 도밍고도 기부제다.
기부제인 경우 나는 일반적인 공립 알베르게 가격인 5유로를 냈는데
짠돌이 뤼노는 냈을까 안 냈을까? 냈다면 얼마를 냈을까?
씨에스타를 즐겨볼까나.
씻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샤워를 한 후, 조금 서늘한 실내에서 뽀송뽀송 포근한 침낭 속으로 파고드는 기분은 정말이지 끝내준다.
낮잠을 맘껏 누렸다.
얼마나 잤을까.
두 시간은 지난 것 같았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지나친 씨에스타는 몸에 좋지 않다.
새끼발가락이 붓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주방을 뒤져보니 쌀이 조금 있었고 소금 및 기름, 양념이 충분했다.
오늘 저녁은... 밥! 또 밥이다.
약간의 쌀을 더 사서 덮밥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뤼노도 아픈 발을 끌고 장보기에 함께 나섰다.
식비를 아끼지 않는 우리가 못 미더워서는 아니었다.
싼토 도밍고는 둘러보기에 좋았다.
맨질맨질하게 발때 묻은 돌바닥이 정겨웠고
안개 낀 알베르게 주변은 어쩌다 지나가는 자동차가 어색했고, 대신 말이나 마차가 어울릴만한 분위기.
거리에 사람은 없었지만 아까 지나왔던 유령마을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치킨이 닭으로 되살아난(치킨이나 닭이나) 이 마을의 전설 때문인 듯, 가게에는 닭과 관련된 기념품이 눈에 많이 띄었다.
메뉴는 사무엘이 정했다.
재료를 고르는 것만 봐도 어째 불안했다.
파프리카와 양파까지는 괜찮은데 호박과 가지라니.
쉽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또 무슨 짓을 벌일지 살짝 염려가 되었다.
사무엘이 가지와 애호박, 양파 등으로 덮밥소스를 만들었다.
어째 만드는 게 아니라 실험하는 것 같았다.
어설프게 칼질을 하고 있는 우리와는 다르게 옆에서는 이탈리아 요리사가 능숙한 솜씨로 칼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뚝딱뚝딱, 옆에선 다다다다...
어디서 솟아나는 자신감인지, 사무엘은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요리를 했다.
정말 부러운 것 중의 하나.
내가 잘하든 못하든 자신 있고 떳떳했으면 좋겠다.
사무엘은 그런 점에서 본받고 싶었다.
상대가 누구든지, 누구와 함께 있든지 자기 소신(?)을 피력한다.
어쩌다 남에게 피해를 줄지언정,
그 피해마저도 즐거움으로 만들어 버리는 매력이 있었다.
가지 호박 소스를 얹은 밥과 참치 통조림을 와인, 맥주와 곁들여 먹은 저녁은 사무엘의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한 테러 덕분에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엊저녁에 해먹은 거금 8유로짜리 저녁이 조금 억울하기도, 아깝기도...
그러나 밥이 많이 남아버렸다. 밥물은 잘 맞췄는데 양을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밥이 남았다.
게다가 이탈리아 요리사가 만든 파스타도 남아서 그야말로 배가 찢어져라 먹었다.
스페인팀은 죠셉과 홀리안, 둘만 조금 늦게 들어와 간단히 빵과 하몽 등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우리의 밥과 이탈리아 요리사의 스파게티를 나눠먹었다.
나머지 일행은 밖에서 먹나 보다.
죠셉이 준 보따의 와인을 돌려 마셨다.
와인 타령을 하던 사무엘이 즐겁게 보따로 포도주를 들이부었다.
금방 보따가 비워져 자주 포도주를 채워야 했다.
베아는 오늘도 치료를 받았나 보다.
요한이 베아를 잘 챙겨준다.
불행하게도 베아의 발이 점점 회복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지 딴에는 조금 친해졌다고 여기는지 웃으며 '툭'치기도 했다.
모두들 잠자리에 든 후 거실로 나왔더니
빈 탁자 위에 남겨진 바게뜨가, 풍성했던 저녁을 증명하고 있었다.
길동무들이 좋긴 했지만 혼자 있으니 편했다. 신경 쓸 일도 없고.
그래, 하루 중 어울리는 시간과 혼자인 시간을 적당히 나누는 게 좋다.
따뜻한 색감의 공간에 앉아 있으니 참 아늑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기는 하지만 언어문제도 그렇고, 아무래도 신경을 써야 하니 조금은 피곤했는데
안락한 의자에 앉아 조용히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집에다가는 그냥 유럽여행 다녀온다고 했었다.
'까미노'가 뭔지도 모르시고, 또 유럽이긴 하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안녕한지 궁금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집 나오면 연락을 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국제전화요금이 무서워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집에서도 연락이 없다.
생전 처음 해외여행을 나왔는데,
잘 있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궁금하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나와 같은 마음인지..
그래도 조금 서운 한 건 사실이었다.
내가 서운한 만큼 집에서도 서운하겠지,
아니면.. 뒤치다꺼리할 놈 하나 없어졌다고 두 다리 쭉 뻗고 계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