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루어진다... 반대로

벨로라도 - 아헤스

by 외투




간밤의 꿈에 누군가 나를 위해 안경을 만들어 주었는데.... 무슨 꿈이지?

그나마 눈이 쓸만했지만 이제 눈도 한물가고 있다는 암시일까,

아니면 까미노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썬글라스에 대한 아쉬움일까,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이 계절의 그것은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아침에 먼저 길을 나서는 한국에서 온 그녀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헤어졌다.

내가 괜히 벨로라도 알베르게로 안내해 험한 꼴을 겪게 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끔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건강하게 여행 마치기를....


발의 물집 상태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며칠 비가 오지 않은 데다... 결정적으로 어제 샤워를 하지 않아 발이 뽀송뽀송 말라서 좋아진 게 틀림없었다.

상태가 괜찮아지다가도 샤워를 하다 보면 발이 물에 불면서 물집의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기를 반복했었다.

종종 샤워를 하지 않는 것도 괜찮겠다.

점점 굳은살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 어깨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놈의 미친 배낭이 좀체 가벼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장에서 쟀을 때가 12kg이었고, 거기다가 음식과 물까지 더하면 13kg 는 가볍게 넘길 것이니

어깨가 아프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겠지.


오늘도,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안개가 끼었다.



포즈를 잡고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지만 자연스러운 사진을 더 좋아해서

작은 교회 앞에서 쉬면서 간식을 먹으면서 씨그릿과 오바츠의 사진을 몰래 찍다가 씨그릿과 눈이 마주쳤다.

씨그릿이 씨익 웃으면서


“파파라치~”


오늘은 작은 산을 넘었다.

산에 올라 지나온 마을들을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산아래로 자욱한 안개가 가려버렸다.

오르막을 어느 정도 올랐을 무렵 갑자기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도 아니고 따뜻한 바람.

마침 서늘하다고 느끼고 있어서, 뤼노와 나는 둘 다 이런 따뜻한 바람은 처음이라며 바람맞은 걸 좋아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따뜻한 바람~'

곳곳에 무슨 안내판이 서있었다. 뤼노가 '사냥 주의', '버섯채취금지'라고 알려줬다.

그러고 보니 드문드문 총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정상 부근에서야 안개가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스페인 사람 한분(호세)이 '헤럴드'를 아느냐고, 보았느냐고 묻는다.

헤럴드 할아버지(캐나다)는 까미노가 3번째인가 4번째라고 했었다.

그때마다 스페인 친구를 사귀어 놓고 다시 올 때마다 불러내어 함께 걷는단다.

호세는 까미노 친구를 만난다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걸어갔다.




정상 부근의 내전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 다시 한국인 한 분을 만났다.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고.... 그동안 어디들 숨어있다가 이렇게 나타나는 건지.

내 또래의 남자분이었는데 중국과 인도를 거쳐 왔단다.

다음 일정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며 하루에 거의 40km씩 강행군이란다.

하루에 40km라.. 정말 대단하다.

잠깐 간식을 나누고 먼저 출발하셨다.

어제 까미노에서 처음 만났던 한국인 두 분은 아주 천천히 걸어서,

오늘 만난 한분은 너무 빠르게 걸어서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너무 빨랐거나 혹은 너무 느렸을 테지.





헤럴드 할아버지가 까미노 친구 호세와 만났다.

그 연세에 몇 번이나 까미노에 왔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친구를 만들어 계속 연락을 하며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헤럴드 할아버지는 영어는 물론 스페인어도 아주 잘 하셨다.

유창한 스페인어도 한몫을 했을 것이고 그리고 시간적,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야겠지.

서로 초대하고 또 초대에 응하려면.

내게는 너무 먼 얘기다.

우선 마음부터 많이 움츠러들어 있다.


산을 넘어 산후안 오르테가에 도착했다.

뤼노는 오래된 교회인 산후안 오르테가에서 묵고 싶어 했으나 이 시기에는 문을 닫는다.

일전에 이곳에서 묵었다는데 아주 좋았단다.

나도 오래된 교회에서 한번 묵어보고 싶었는데...




교회 앞에서 쉬고 있던 홀리안과 헤수스, 리싸르도를 만났다.

우리가 합세하자 곧 홀리안의 사진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태도가 어째 영 시큰둥했다.
'인물사진을 찍을 때는 눈에 초점을 맞춰야 해..' 하며 알려준다.

바로 이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실습.

그러나 정작 찍은 사진을 보니 홀리안 사진만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리게 나왔다.

이런 면이 홀리안을 친근하게 만들었다.


곳곳에 사냥꾼들과 차량이 보였다.

사냥으로 잡은 동물들도 보였다.

사람들이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홀리안과 헤수스는 자기 나라라 그런지 미안해하기까지 했다.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다음 마을인 아헤스로 향했다.



아헤스에서는 주말 단체 순례자들 때문에 망할 놈의 무니씨팔 알베르게가 만원이어서,

마을 초입에 있는 사설 알베르게를 숙소로 잡았다.

왠지 날라리 순례자들에게 숙소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언짢았다(투어리스트 주제에).

저녁식사와 내일 아침 식사를 포함해서 19유로!

뤼노가 잠시 고민을 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신 아침식사를 빼고 15유로를 냈다.

이곳 알베르게는 여권을 맡겨야 했다.

가끔 여권을 확인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뤼노에게 물어보니 괜찮다고 한다.

뤼노와 내가 짐을 푼 방에 씨그릿과 오바츠가 들어왔다. 반가워라.

우리 방엔 2층 침대 3개가 있었지만 4명이 묵었다.


저녁 식사 전에 스페인팀과 바르에 가서 맥주 한잔 하기로 했다.

바르는 무니씨팔 알베르게에 딸려있었다.

마침 스페인과 영국의 친선 축구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직접 경기장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바르에서 맥주를 마시며 관람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모두들 스페인을 응원하는 가운데 헤럴드 할아버지만 그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영국을 응원했다.

헤럴드 할아버지의 까미노 친구 호세가 조금 무안해하는 게 재미있다.

사실은 나도 박지성이 뛰고 있는 영국리그가 더 친숙해서 속으로는 영국을 응원했다.

주말 저녁이면 마을의 바르에 사람들이 모여 함께 축구를 보며 한잔하는 게 중요한 일과이다.



전반전이 끝나고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람들을 따라 잠시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왔다.

음식점이나 바르에서는 금연인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선선한 저녁 바람을 쐬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후안호가 태권도를 배웠다며 발차기를 보여준다.

우리말로 ‘앞차기’, '돌려차기' 하면서 발차기를 했는데

“낚아 차기” 하면서 발차기를 했다.

낚아 차기라니,

아무리 내가 방위 출신이라지만 군대에서 배운 바로는 전혀 듣도보도 못한 생소한 기술과 용어였다.

'후안호가 태권도 고수였나?'

아닌 달밤도 아닌 늦은 저녁에, 체조도 아닌 태권도 발차기라니...

생각보다 태권도가 널리 알려져 있나 보다.

한바탕 발차기 퍼레이드가 끝난 후 이어지는 후안호의 질문.

"태권도하고 가라데 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

‘태권브이랑 마징가랑 싸우면 누가 이겨?’ 이래로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초딩스런 순진한 질문.

그거야 싸움 잘하는 놈이 이기지.

스페인엔 가라데도 많이 들어와 있나 보다.



다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씨그릿과 오바츠가 그제야 바르로 들어섰다.

‘요런, 우리만 빼놓고 모두 여기 모여 있었네’ 하듯이 웃으며 눈을 흘겼다.

뤼노는 배구를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과연 축구에 대해 전혀 몰랐다.

선수 이름은 물론 경기규칙도 모르는 것 같았다.

스페인의 캡틴 ‘뿌욜’ 이 빠진 수비가 불안했는데...

한골 먹고 나서야 ‘뿌욜’을 투입했지만 결국 경기는 스페인이 0대 1로 졌다.

헤럴드 할아버지는 기뻐서 환호했고, 호세는 ‘이런 친구를 봤나?’ 하는 표정으로 멋쩍게 웃었다.

경기가 끝나자 후안호가 물었다.

"아유 쌔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와이?"

했더니

‘스페인이 져서 슬프지 않냐?’ 고 하는 말이었다.

영국이 이겨 내심 좋아하고 있었는데..

비록 스페인이 졌지만 함께 축구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둘러댔다.

순간 후안호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눈치챘으려나?

설마 눈치채고서 낚아차기로..

모두들 아쉬워하며(나와 헤럴드 할아버지만 빼고) 바르를 나섰다.

맥주값은 리싸르도가 쐈다.




꿈은 이루어진다. 반대로


9시가 넘어서야 먹은 알베르게의 저녁 식사는 그저 그랬다.

오랜만에 사 먹는 저녁이라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지만,

빠에야(볶음밥 비슷하다)가 밥의 완성도도 그렇고 맛도 별로였다.

모두들 전채로 나온 샐러드에 대해서는 '쏘 프레시' 라며 좋아했지만,
빠에야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라며 ‘말하기도 싫다’ 고 했다.

그래도 주방에서 일하시는 '이모님'의 호탕하고 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모님과 리싸르도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오누이처럼 스스럼없이,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갔고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유쾌했다.

시끄러움이 가득한 식당에서 헤럴드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캐나다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라며.

맛은 없었지만 왁자지껄한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왔는데,

오바츠가 안경다리 나사가 자꾸 풀린다며 조여달라고 했다.

맥가이버칼로 나사를 꼭 조여주었다.

꿈은 반대라더니....


자기 전에 오랜만에 일기를 정리해볼까 하고 노트를 꺼내려고 했는데.. 안보였다.

배낭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질 않았다.

어차피 작은 수첩에 메모한 것을 옮겨 적는 용도였지만,

어디에 두었더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