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따나스 - 프로미스타
어릴 적 소원 중 하나는 스파이더맨이 되는 것.
빨강, 파랑의 멋진 타이즈를 입고 빌딩 숲을 날아다니는 스파이더맨.
말도 안 되는 소원이었지만 어릴 적이니까.
얼마나 되고 싶었으면 거미 새끼를 손등에 올려놓고 '물어물어!' 했을까.
그나마 스파이더맨이라 그랬지, 수퍼맨이었다면 보자기 두르고 장독대에서 뛰어내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이에도 수퍼맨은 너무 황당할 만큼 전지전능해서 도무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파이더맨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
좀 더 현실적이라면 거미줄도 손목에서 발사되면 안 되는 건데....
엉덩이에서 거미줄을 발사하는 스파이더맨은 상상만 해도 우스꽝스럽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멋진 타이즈를 손수 만들어 입는 게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
아침이슬이 영롱하게 빛나는, 한 땀 한 땀 수놓듯 지어진 거미집을 본다면
그건 오히려 사실성을 뒷받침해주는 요인에 가깝다.
간밤에 자는데 머리에 뭔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혹시.. 거미?
아니나 다를까, 자고 일어나 벌레 한 마리를 잡았다.
'뭐지.. 베드벅인가?' 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다들 모르겠다고 한다.
죠셉만 조금 심각하게 들여다보았다.
스페인 청년 호세가 웃으며 '레알 굿 알베르게'라고 했다.
자기 나라 알베르게에서 벌레가 나오자 창피함을 무마시키려고 한 말이었을까?
이러다 스파이더맨은커녕, 베드벅맨 되는 거 아냐?
침대에 붙어 기생하며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와 다를 바 없는 배드벅맨.
호세의 말마따나, 벌레가 있는 정말 좋은 무니씨팔알베르게를 나와 조금 걸으니 헤럴드가 보였다.
스페인팀은 앞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혼자 걷고 있었다.
헤럴드가 자기 오른편에 서서 걸어달라고 했다.
어제는 미처 몰랐었는데 왼쪽 귀가 어두워 잘 들을 수 없다고 했다.
작은 마을에 도착하니 바르에서 요한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래?’ 했다.
바르에는스페인팀과 헤럴드의 까미노 친구 호세도 있었다.
뤼노와 나는 카페 꼰 레체를, 헤럴드는 비노를 주문했다.
헤럴드는 바르에 머물 때면 포도주를 마셨다. 음주보행.
적당한 포도주는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마을을 벗어나 한참을 걸으니 언덕이 나왔다.
가끔 자전거 순례자가 지나갈 때면 부러웠었는데, 이런 언덕을 만나면 오히려 걷는 게 부러울 것이다.
헤럴드와 인사를 나누고 뤼노와 나는 앞서 걸었다.
뤼노와 나는 종종 헤럴드의 낮고 굵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하는 ‘헤럴드 놀이’를 했다.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던 멋진 풍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이 탁 트인 들판 사이를 가르는 길이 끝 간 데 없이 아스라이 굽이쳤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우리의 언덕 뒤에는 어떤 길이 놓여있을까.
자전거를 타고, 아니 끌고 올라왔다면 죽을 맛이었겠지만, 여기서부터는 정말 신나는 내리막길이 되었겠다.
사진 속의 길이 보기에는 좋지만.. 실제로 걸으면 더 좋다.
지평선을 보기 힘든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풍광에다, 날씨도 선선하니 걷기에 그만이었다.
게다가 깨끗한 공기까지 더해져 가슴속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2시간 가까이 걸어 작은 마을에서 요한과 베아를 만났다.
둘은 스틱을 사용했는데, 스틱질을 하며 걷는 발걸음이 아주 리드미컬했다.
그러다 지치면 스틱에 몸을 의지하고 쉬기도 했다.
베아도 발이 많이 좋아졌는지 아주 잘 걸었다.
요한이 한국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베아도 덩달아 들려달라고 조른다.
어떤 노래를 들려줄까.. 하다가 고른 게 윤도현의 '사랑 TWO'.
직접 불러주지는 못하고 휴대폰 스피커 볼륨을 최대치로 해서 플레이했다.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너
은은한 달빛 따라 너의 모습 사라지고
홀로 남은 골목길엔 수줍은 내 마음만
나의 아픔을 가만히 안아주는 너
눈물 흘린 시간 뒤엔 언제나 네가 있어
...
좀 신나는 노래를 들려줄걸 그랬나, 요한과 베아, 뤼노의 반응도 그저 그랬고..
노래를 들으며 걷다 보니 괜히 쓸쓸해졌다. 날도 꾸릿꾸릿한데.
한국이 그리워졌다.
에이, 괜히 노래는 들려달라고 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목적지였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알베르게는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벌써 30km 가까이 걸었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 모두 난감해했는데
호스피탈레로가 비도 피할 겸 잠시 쉬어가라며 포도주를 꺼내 놓았다.
호스피탈레로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 말이 그렇게 반갑게 들리지는 않았다.
명동에서 일본 사람이나 중국사람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장사꾼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내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사람들.
나는 또다시 외국어반의 열등생이 되어 그들의 대화를 구경했다.
스페인어라 무슨 얘기를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영어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가끔 '꼬레아노'라는 단어가 들리긴 했는데, 한국사람 칭찬을 하는 건지 뒷담화를 하는지는 모르겠고..
한편에서 포도주나 홀짝였다.
결국 다음 알베르게가 있는 프로미스타까지 가기로 했다.
프로미스타까지는 약 7km, 거의 두 시간 거리였다.
비가 많이 쏟아지기 시작해 모두 비옷으로 갈아입었다.
나도 ‘프랑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격’이라는 뤼노의 말에 혹해서 샀던 방수 바지를 꺼내 입었는데
스타일이 말이 아니다.
뤼노도 ‘프랑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패션’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보았다.
사람들도 웃는다.
비니루 몸빼!
이왕 입은 거 다시 벗을 수도 없고.. 우산까지 쓰고 어기적 어기적 걸었다.
이 날의 '워스트 드레서' 또는 '까미노 패션 테러리스트' 가 아니었을까.
그나마 방수 성능이 끝내주게 좋아서 물폭탄이 쏟아진대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멋 내다 똥독에 빠지는 것' 보다야 백배 낫지.
양 떼와 나귀도 비에 젖어 추워 보였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힘들게 프로미스타에 도착했다.
프로미스타 초입에 오래된 수로가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조금 무서워보였다.
알베르게 근처에 교회가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하고 기품 있는 프로미스타의 교회.
헤수스,홀리안과 입구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는데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단다.
그냥 나오려는데 헤수스가 입장료를 내줬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조용한 교회의 분위기가 한층 더 따뜻했다.
홀리안이 삼각대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잠깐 홀리안의 사진 강의가 있었고..
우리밖에 없었는데도 왠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얘기하게 되었다.
조용조용 교회를 둘러보았다.
발소리도 죽여가며.
담백, 단아, 단정한 교회였다.
잠시 앉아 숨도 고르고.. 휴식을 취했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 오래 있지 못한 게 아쉬웠다.
밖으로 나오니 날은 저물고 비는 그쳐 가고 있었다.
알베르게에 들어가 등록을 했다.
잠시 뒤에 죠셉과 헤럴드가 무사히 도착했다.
죠셉의 발목도 좋아졌나 보다.
헤럴드가 도착하자 호스피탈레로가 축하해주었다.
대단한 헤럴드.
30km를 훌쩍 넘는 먼길을, 그것도 빗속을 뚫고 잘 도착했다.
2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서는데 얼핏 옆방에서 동양 여자를 보았다.
말을 걸어보니 한국인이었다.
경상도 출신의 D.
그동안 방명록에서 하루나 이틀 차이로 나를 앞서가고 있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
일행 때문에 인사만 나누고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을 끝으로 젊은 후안호가 까미노를 끝낸다고 했다.
이날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후안호는 수의사라고 했다.
그래서 베아가 후안호의 조개껍데기에 개와 고양이를 그려 달라고 했었구나.
이별의 만찬을 갖기로 했다.
오늘은 뤼노의 의사와 상관없이 메뉴 델 디아를 먹게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헤럴드는 고단한지 알베르게에 남고,
나는 뤼노와 수퍼마켓에 들러 내일 먹을 빵과 간식을 사들고 식당으로 갔다.
후안호와는 그렇게 많이 함께 걷지도 않았고 '태권도 발차기' 외에는 그다지 많은 대화도 나누지 못해서
'괜히 끼는 거 아냐..?' 했는데, 그냥 편한 저녁식사 자리였다.
특별한 이벤트나 선물 없이 한 끼 식사 같이 하는 정도의..
같이 밥이나 먹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후안호가 고마워했다.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후안호에겐 미안했지만 메뉴 델 디아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생선요리를 시켰는데, 헤수스가 자기가 시킨 돼지고기 수육 같은 것도 맛보라고 했다.
'음, 부엔부엔..'
조촐한 송별 만찬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는데 어깨 부근에 모기에 물린 듯한 자국이 보였다.
조금 가려운 것 같기도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알베르게 1층의 로비에서 한잔 더 하자고 했다.
스페인 스타일인가, 돌아가며 알고 있는 우스갯소리를 한 가지씩 했다.
당연히 못 알아 들었지만 덩치 큰 헤수스가 상당히 가벼운 톤으로 성대모사를 해가며 하는 얘기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내게도 한마디 해보라고 했는데.. 나는 다시 열등생 모드로 돌아갔다.
휴가가 끝나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후안호가 많이 아쉬워했다.
어둠 속에서 이별의 인사사 더 편했다.
불 꺼진 방에서 후안호가 한 사람씩 안아주었다.
이미 잠자리에 든 다른 사람들 때문에 조용히 속삭이듯 인사를 나눴다.
'살루트'
'부에나스 노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