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찍어야 돼

프로미스타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by 외투




아침에 뤼노의 '안뇽'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잔소리 '배드 필그림!'

'배드 필그림' 아니라니까 그러네..

'배드 필그림'은커녕 '베드벅맨'이 되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에 물린 상처가 더 늘어나 있었다.

모든 병은 초기에 잡아야 빠른 치료를 할 수가 있는데 꼭 숨기고 참다가 병을 키우고,

도저히 견디다 못할 지경이 되면 그제서야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증상으로 보아 분명 베드벅에 물린 게 확실했지만,

무슨 암이나 불치병에 걸린 것처럼 애써 현실을 외면하면서

'모기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잠깐 가렵다가 괜찮아질 수도 있겠지'

라고 자위하면서 하고 하루 더 두고 보기로 했다.


1층 로비에서 어제 인사를 나눈 D, 뤼노와 아침을 먹었다.

각자의 배낭에서 먹을 것들을 꺼내놓고, 빵이며 과일을 나눠먹었다.

대구에서 온 D는 혼자서 여행 중이라고 했다.

남자인 나도 혼자 여행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는데, 여자인 D는 혼자서 여행만 잘 하고 있었다.

그녀도 러시아 항공을 타고 왔단다.

나처럼 수화물도 아무 이상 없이 잘 왔다고 했다.

수화물 분실과 연착으로 악명이 높은 러시아 항공이었는데 우리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간도 그렇게 지연되지 않았고 수화물도 안전하게 받았다.

나에게 러시아 항공은,

'하늘 위의 호텔' 또는 '하늘 위의 궁전' 까지는 못되어도 '하늘 위의 알베르게'정도는 될 것 같다.

시설은 좋지 않아도 싸고 만만한..

'하늘 위의 알베르게' 아에로플로트.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순박한 죠셉 아저씨가 길 한가운데 서서 배낭을 뒤지고 있었다.

수심가득한 얼굴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벨트쌕에 들어 있었는데 없어졌단다.

까미노는 죠셉에게 많은 시련을 지워주는구나.

어제는 발목 때문에 포기할 뻔하더니 이번엔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별 도움도 못되고 우리는 그냥 곁에 서서 '잘 찾아봐요'라는 말밖에..

그런데 갑자기 죠셉이 두 손을 번쩍 들더니 "알레그리아 델 디아!!"라고 크게 외쳤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배낭 속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이런 깜짝 놀랐잖아' 함께 웃었다.

죠셉은 종종 이렇게 예상치 못한 깜짝 즐거움을 만들어 주었다.

'알레그리아 델 디아'는 뜻하지 않게 찾아온 기쁨을 표현하는 말인데,

이후로 나도 몇 번 써먹었다.

순박한 죠셉 덕분에 아침이 알레그리아 하게 시작되었다.



진짜 스페인 하늘


D, 뤼노, 호세와 함께 걸었다.

호세는 스페인 청년으로 항상 웃는 얼굴이 특징이다.

배드벅이 있는 알베르게 조차도 웃는 얼굴로 '정말 좋은 알베르게' 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D가 '쟤 귀엽네..'라고 했는데 남자인 내가 봐도 생긴 거나 하는 짓이나 귀여웠다.

말끝마다 윙크도 날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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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 휴식을 취할 때면 인사로 '올라, 깨딸(안녕, 어때)?' 물으면

습관적으로 '부엔(좋아)'이라고 대답했는데,

입으로는 '부엔'이라고 하면서도 표정은 그게 아닐 때가 있다.

그러면 호세는 흉내를 내며 힘든 표정을 지으며 '브우우~우에에엔' 했다.

그러면 바로 표정이 '부엔부엔' 되었다.

이런 바보 같을 정도의 천진난만이라니, 바보 호세.

여행이 끝난 후에도 '호세'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는 이런 호세를 보고 '올웨이스 해피'라고 일컬었다.


IMG_0589.jpg?type=w740 '수퍼마켓이 문열었나?'했더니 '미니마켓'이라며 확인하는 호세


점심은 마을 쉼터에서 D, 뤼노, 호세와 힘께 먹었다.

바게뜨에 참치 통조림, 정어리 통조림, 그리고 마늘을 넣어 보까디요를 만들어 먹었다.

물론 호세는 마늘을 넣어 먹는 보까디요가 맛있다며 웃었다.

요한과 헤수스가 도착했고, 함께 바르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헤수스, 산 호세, 산 후안(상한) 이렇게 3대 성인이 함께 있다며 웃는다.

부르고스에서의 '메뉴 델 디아' 외에는 철저하게 더치페이하던 뤼노가,

D가 있어서 그런 건지 계산을 했다.

누가 프랑스 남자 아니랄까 봐 과연 숙녀 앞에서 더욱 친절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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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가 '이게 진짜 스페인 하늘이야'라고 했다.


오늘의 숙소는 학교에 딸린 알베르게다.

수녀님들도 간간이 보였고 한쪽 교실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건지 노는 건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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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 도착해서는 요한과 캐나다 삐엘과 같이 농구를 했다.

물집으로 발이 아픈 뤼노의 잔소리 '크레이지!'

정말 미쳤지.

여기는 스페인이라고! 축구를 했어야지!

농구를 하고 파김치가 되어 잠시 침대에 뻗었다.

내 코 고는 소리에 놀라 내가 잠이 깼다.

그러게 농구는 왜 해가지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축구를 해야겠다.

그러면 내 코 고는 소리에 내가 깰 수도 없이 곯아떨어지겠지.


이상하게 걸을 때면 괜찮은데 도착해서 쉴만하면 슬슬 가렵기 시작했다.

배낭에 쓸린 어깨 부위는 상처가 더 늘었다.

혹시나 남에게 옮기는 건 아닌지, 침대에도 옮기는 건 아닌지,

괜히 얘기했다가 알베르게에서 쫓겨나는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도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결국 고백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모두들 괜찮은데 하필이면 나만 베드벅에 물려가지고..

그럴리는 없었겠지만 그날 온따나스에서 헤럴드를 따라서 무니씨팔이 아닌 사립에서 묵었더라면,

무니씨팔에 묵더라도 침대를 홀리안에게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베드벅에 물리지 않았을 텐데..

누구를 원망할까만.. 그래도 왜 하필 나냐고!

까미노 초기에는 꼭 침대에 짐을 풀기 전에 유심히 살펴보곤 했었는데,

며칠 아무렇지 않으니, 그만 베드벅은 먼 나라 얘기라도 되는 듯 방심한 탓이었다.


오늘의 셰프는 '헤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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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14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저녁을 헤수스가 책임지기로 했다.

해물과 채소를 넣고 끓이다가 쌀을 넣어 익힌다.

우리처럼 처음부터 물에 쌀을 넣어 익히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해물이 익을 즈음해서 쌀을 나중에 넣는 게 달랐다.

가만히 앉아 있기가 뭐해서 옆에서 시키는 대로 칼질을 하거나 국자로 저었다.

D도 돕는다.


음식 사진은 잘 찍질 못했는데,

'찍기보다 먹기가 급해서?'는 아니고 그냥 밥상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뭔가 이상한,

마치 '남들 열심히 노는데 공부하려고 책 펴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남들 열심히 노는데 책 편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이건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두고두고 아쉬워할 것 같아서 용기를 내어 사진을 찍었다.


IMG_0628.jpg?type=w740 아로스 데 헤수스


사진을 보면 그때 그 맛이 조금 기억이 난다.

해산물과 어우러진 짭짤한 밥과 빵, 그리고 포도주.

나도, D도, 뤼노도, 모두들 맛있게 먹는데

베아만 깨작깨작.. 다이어트하나 보다.

냄비 바닥을 긁던 뤼노가 냄비를 내게 건넸다.

14인분의 요리를 이렇게 맛있게, 정확하게 하다니 헤수스는 요리사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누니 2유로가 채 되지 않았다.


저녁 식탁에서 스페인어의 관용적 표현에 대해 잠깐 얘기가 있었다.

'hostia - 오스띠아'

원래는 미사에서 성체 의식 때 사용되는 동그란 전병을 일컫는 말인데

속어 비슷하게 '깜짝이야' '우와 놀랍네-' '어머나' 등의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고 했다.

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 헤럴드가 설명해줬다.

그리고 또 다른 뜻으로 다른 사람을 때릴 때도 '오스띠아'가 사용된다고 했다.

'맞아랏 맞아랏~' 장난스레 때릴 때.

옆에 있는 헤수스를 때리며 '오스띠아 오스띠아...' 했더니

헤수스가 '맞아, 이럴 때 사용하는 거야' 하며 웃으며 맞아주었다.

자기 나라 말을 캐나다 사람인 헤럴드가 더 자세히 설명해주니 헤수스가 무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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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기대어 '이제 잘까?' 하는데 건너편 침대의 베아가 그런다.

"유 룩스 라이크 엔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나..?' 했더니 맞단다.

안경을 끼고 있길래

'유 해브 꽈뜨로 아이즈, 와이 디쥬 쎄이 댓?' 했더니 옆에서 '올웨이스 해피' 호세가 웃는다.

베아와는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는 없었지만

같이 걷고, 얘기하고, 먹고, 자고 하다 보니 어느새 미운 감정이 줄고 편안한 정이 늘었다.

어쩌면 애초에 미운 감정은 나만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천사는커녕 천사의 탈을 쓴 베드벅맨..

이곳 알베르게의 호스피딸레라는 정말 푸근한 천사 같았던 수녀님이다.

보는 사람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인자함이 물씬물씬 풍겨 나왔다.

천사 같은 수녀님에게 베드벅맨임을 고해바칠걸.


수의사 후안호라도 있었으면.. 후안호는 오늘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타이밍도 참 잘 맞추지.

일단 벌레에 물렸으니 안티푸라민이라도 발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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