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아

까리온 데 라스 꼰데스 - 모라띠노스

by 외투



1층 침대에서 편하게 잠을 잘 잤다.

가려움은 덜 했다.

주방에 내려가 씨리얼과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계란을 삶아 사람들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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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가 자욱한 작은 강을 건너 오늘도 걷기 시작.

뤼노가 D를 잘 챙겨주었다.

이 날의 길은 기억도 잘 안 날 만큼 지루하고 평탄하기만 했다.


한참을 걸어도 마땅한 쉼터도 보이지 않고..

점심도 먹을 겸 길가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어쩌면 그렇게 긴 거리를 걷는 동안 마을 하나 없는지.

계란도 까먹고... 허기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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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와 뤼노가 정답게 얘기하길래 앞서 보내고 뒤쳐져 혼자 걸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안티푸라민이 효과가 있기를.. 하는 기대를 했지만,

아침에만 덜 했을 뿐 오후가 되면서 다시 가려워졌다.

베드벅에 물린 상처는 잠잠했다가도

어느 순간 느닷없이 한꺼번에 가려움이 몰려와 순간적으로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을 훑고 지나가고 나면 식은땀이 나고 맥이 풀렸다.

정말 이러다가는 포기하는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비로소 나는 베드벅에 물렸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까미노에는 많은 즐거움이 있지만 장애물도 있다.

언어, 인종차별, 돈, 물집..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베드벅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하필 베드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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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도 없이 평지만 계속되는 지루한 길.

이제 '지루함'도 조금 생겼다.

풍경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사람들과도 실컷 어울린 데다가 베드벅때문에 신경이 쓰여 그런지 별로 신이 나지 않았다.

괜히 왔다는 후회도 들었다.

프랑스길도 거의 중반에 다다른 이때, 까미노 권태기랄까..

초심을 잃고 매일 반복되는 패턴에 익숙해져 버렸다.

하긴 그런 게 초심이다. 언젠간 잃게 되는 것.

자고, 먹고, 걷고, 먹고, 마시고..

몸이 편치 않으니 마음도 따라서 부정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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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고스에 도착하니 모두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곳에 알베르게가 열었다는 말에 머물려고 했는데,

조금 더 가면 새로 생긴 괜찮은 알베르게가 있다며 알베르게 홍보 전단지를 보여주는 베아.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쓴 얼굴을 들이대고 코맹맹이 혀 짧은 소리로 같이 가자고 재재거리는데,

거의 처음 만난 날 뤼노에게 했던 '오올라아앙~' 수준이었다.

자, 다음 마을로 가기로 하고 단체사진을 찍기로 했다.

요한이 카메라를 들고 앞에 서자 홀리안이 나서서 자기가 찍겠다며 카메라를 가로챘다.

모두들 시진 찍기만을 기다리는데 찍사가 주문이 많다. 좀 더 모여라, 좀 더 웃어라,..

안 그래도 막바지라 힘들어 죽겠는데 웃음 섞인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에~ 빨리 찍어라, 힘들어 죽겠다, 홀리안 그럴 줄 알았다, 작품 찍냐..'

'잠깐만..'

결국 땅을 보거나 얘기를 나누거나 하는, 시선들이 제각각 산만한 왁자지껄한 사진 한 장 찍고 출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진이 더 마음에 든다.

표정이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사진.

사진을 보니 내 옆에 베아가 있다.

처음 같이 사진을 찍을 땐 양쪽 끝에서 끝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옆자리도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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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좀 떨어져 있고 싶었지만 D도 일행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알베르게가 가까워지면서 언제 힘들었냐는 듯 신이 나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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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띠노스에는 땅을 파고 만든 집들이 있었는데 포도주 저장창고라고 했다.

뤼노가 사진 찍기에 재미 들렸는지 내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다.

알베르게는 새로 오픈을 해서 아직 채 자리를 잡지 못한 느낌이었지만 깨끗했다.

호스피탈레로의 키가 2m 는 되어 보였는데,

전직 특수부대원 출신도 아닌, 전직 이탈리아 국가대표 배구선수였단다.

유럽에서는 의외로 배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씨즌에만 반짝하는 스포츠인데.. 뤼노도 배구를 좋아했고 또 잘 한다고 했다.

키 큰 사람답게 약간 싱거운 면이 있었지만 서글서글하고 친절했다.

까미노가 얼마나 좋으면 이렇게 타국까지 와서 알베르게를 열었을까.

나라면 아무리 까미노가 좋대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며칠 머무는 것이라면 몰라도,

아예 눌러앉아 알베르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호스피탈레로의 일상이라는 게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사람들이 떠난 알베르게를 청소하고,

또 다른 사람을 맞이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어울리고, 정리하고..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텐데,

차라리 힘들어도 계속 걷는 게 더 좋다.

투철한 봉사정신을 갖고 있거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함께하는 저녁식사시간, 모두들 음식을 주문하는데 뤼노가 자꾸 갖고 있는 부식으로 저녁을 해결하자고 한다.

주방도 없고 모두들 사 먹는 분위기라 나와 D도 주문을 해버렸는데,

뤼노는 홀리안과 함께 메뉴를 주문하지 않고 빵과 햄과 비스킷으로 저녁을 먹었다.


호스피탈레로는 혼자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기가 벅찬지 조금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더니,

주문한 닭고기 스테이크가 덜 익어 다시 조리를 하기까지 했다.

덜 익은 닭이 나왔건만 크게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냥하게 '닭이 덜 익었는데요..' 하며 다시 접시를 건네는 정도.

다시 음식이 나오고 뤼노에게 좀 나눠주려고 했더니 극구 사양을 한다.

홀리한 홀리안도 마찬가지.

부르고스에서의 대접을 언제 두배로 갚아주나..


헤수스가 으레 그렇듯 와인을 권했다.

나는 더 가려워질까 봐 와인을 안 마시려고 '노 모아 와인...' 했는데,

내 손은 말과 다르게 잔을 들어 내밀고 있었다.

'얘 좀 봐 봐, 노모아 와인이라며 잔을 내밀고 있어 푸하하하...'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아, 왜 그랬을까. 이게 조건반사라는 건가?

걷는 동안 '상대가 포도주병을 든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면 '잔을 들것'이라는 훈련을 시켰나 보다.

나도 잔을 들고 내민 나의 손을 보며 순간 '이게 왜..?'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김유신 장군이 애마의 목을 벤 것처럼, 손목을 베어버릴 수도 없고..

이후로 헤수스는 내게 '노모아 와인?'이라고 놀리며 포도주를 권했다.



너는.. 죽지 않아..


샤워를 하면서 보니 어깨와 등에 상처가 많이 늘었다.

걸으면서 자연스레 나의 미친 배낭이 긁어댔기 때문이었다.

'빨리 내가 베드벅에 물린 것을 알려야 해' 하는 나와

'베드벅에 물린 것을 말할 필요는 없어' 하는 내가,

내속에서 마치 골룸처럼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상처를 보고 나서는 '커밍아웃'하기로 했다.

제일 친절한 요한에게 먼저 상처를 보여주었다.

'베드벅에 물렸어' 하면서.

그러자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요한이 한다는 말이 '유 돈트.. 다이..' 란다.

'너는.. 죽지 않아..'라는 뜻의 스팽글리쉬(?)겠지.

아마 요한은 내가 '이 상처가 바로 니네 나라 스페인의 정말 좋은 알베르게에서 벌레에 물린 상처야!'라는 뜻으로 얘기한 줄 알았나 보다.

용기를 내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말했는데 오히려 요한이 더 미안해했다.

'으악 큰일 났다. 가까이 오지 마, 옮을라' 정도까지는 아니더래도 경계할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역시 그렇게 심각해하지 않았다.

살짝 걱정해주는 정도?

역시나 자기 나라 숙박업소의 청결하지 못한 위생상태에 대한 난처함을 그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죠셉이 약이 있다며 크림을 발라주었다.

D가 한국에서 가져온 비오킬을 줘서 배낭과 침낭에 잔뜩 뿌렸다.

힘들게 가져왔을 약 한통을 통째로 내게 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동포애는 이런 걸 두고 나온 말이다.

비오킬로도 모자라 마늘을 까서 여기저기 쑤셔 넣어두었다.

마늘이 좀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베드벅이 흡혈귀라도 되는 것처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날은 스탬프 받는 것도 잊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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