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띠노스 - 엘 부르고 라네로
가려운지는 모르고 잘 자긴 했는데,
아침에 보니 물린 자국이 늘어났다.
베드벅은 정말 쪼로록 몰고 지나간다. 상처가 연달아 있다.
D도 벌레에 물렸는지 가렵다고 했다.
'내게서 옮은 것 아닌가?' 하고 염려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D는 모기에 물린 게 틀림없었다.
옷 밖으로 노출된 모든 목 부위(목을 비롯해서 손목과 발목)만 물렸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노출되지 않은 부위를 물렸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아 스트레스... 조금만 신경 썼으면, 살폈으면 괜찮았을 것을.
아무리 괴로웠던 기억도 낭만적인 추억으로 바꿔버리는 속성 때문에
지금은 돈으로도 사기 어려운 귀한 경험으로 변해버렸지만.
뤼노는 아침도 사 먹지 않겠다고 했다.
나도 그냥 커피만 시키고 뤼노랑 D와 비스킷과 빵으로 아침을 먹었는데,
다른 사람이 시킨 토스트를 보고는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유로짜리 토스트가 그저 잼 바른 식빵 조각이었다.
오늘은 두 갈래길로 나뉜다고 했다.
오리지널 옛길과 마을을 지나는 길.
옛길은 잘하면 늑대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늑대라니, 정말 늑대를 볼 수 있단 말인가?
뤼노에게 물어보니 안내책자에 그렇게 나와 있단다.
늑대를 볼 수 있단 말이지..
지루해진 까미노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겠는걸!?
그런데 사실 '지루한 까미노'는 없다.
마음먹기에 따라 지루할 수도, 즐거울 수도 있다.
가려움은 마음을 어찌 먹던 가려울 테지만.
스페인길을 걷는데 스페인 노래 한곡쯤은 들어줘야..
스페인의 벌판을 걸으며 듣는 '에레스 뚜'.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서반아어' 였었다.
신설된 외국어라 시험문제도 쉬워, 당시에는 '서반아어' 가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고 선택을 했었다.
선생님이 정말 예쁘셨는데 순진하기까지 이를 데 없어서 학생들이 많이 놀려먹었었다.
그 당시 '쎄뇨라 로라'라는 스페인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스페인판 '하녀' 정도로 생각하면 됨)
음흉한(?) 생물 선생님 권유로 서반아어 선생님은 그 영화를 보셨고,
선생님은 19금 영화를 본 게 창피해 생물 선생님을 원망했었다.
물론 야하다는 소문에 우리도 몰래 동시상영관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수업 중에 스페인 노래라며 알려주신 게 바로 '에레스 뚜' 였는데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 몇 소절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Eres tu 당신은..
Como una promesa eres tu eres tu
당신은, 당신은 나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
Como una manana de verano.
어느 여름날의 아침처럼
Como una sonrisa eres tu, eres tu.
당신은, 당신은 나에게 미소를 주는 사람
Asi asi eres tu.
그런, 그런 당신입니다.
Como una esperanza eres tu, eres tu,
당신은, 당신은 나의 모든 희망
Como lluvia fresca en mis manos
내 두 손에 고인 신선한 빗물과 같은 사람
Como fuerte brisa eres tu, eres tu
당신은, 당신은 강한 미풍과도 같은 사람
Asi asi eres tu
그것이, 그것이 당신입니다.
Eres tu como el agua de mi fuente.
당신은 내 마음의 샘물에서 솟아나는
Eres tu el fuego de mi hogar.
샘물과도 같은 사람
Algo asi eres tu, oooh,
당신은 내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
Algo asi como el fuego de mi hoguera,
당신은 내 마음의 모닥불에서 타오르는 불꽃
Algo asi eres tu oooh, en mi vida algo as eres tu
당신은 내 빵에 쓰인 밀가루와 같은 사람
Como mi poema eres tu, eres tu,
당신은, 당신은 한 편의 시와 같은 사람
Como una guitarra en la noche,
밤하늘에 들리는 기타 소리와 같은 사람
Como mi horizonte eres tu, eres tu.
당신은, 당신은 내 마음의 지평선 같은 사람
Asi asi eres tu.
그것이 그것이 당신입니다.
영어 선생님은 싫은데 스페인어 선생님은 정말 좋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걷기에 그만인 박자에다가 자꾸 듣노라면 왠지 힘도 생겨났다.
무한반복으로 설정해놓고 mp3파일이 늘어날 지경으로 듣고 또 들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느낌과 예쁜 선생님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어제의 기분으로 걸었다면 지루했을 길도 오늘은 지루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걸었고,
또 어떤 날은 음악 없이 걷기도 했다.
그냥 고요함 속에 평온하게 걷는 게 좋을 때가 있고,
음악의 힘을 빌려 걸을 때가 있었으며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듣고 싶을 때가 있었다.
'에레스 뚜'는 힘도 되었고 분위기도 잘 맞았다.
'내 빵에 쓰인 밀가루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귀엽다.
두 시간쯤 걸었을까.
작고 낡은 교회가 있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부실했던 아침때 문에 배도 고팠기에 보까디요도 만들어 먹고.
느긋하게 빵을 씹는 여유도 되찾았다.
딱딱한 바게뜨에도 익숙해졌다.
질긴 빵을 잘근잘근 씹고 있으면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씹는 맛이 그만이다.
베드벅에도 익숙해졌으면..
마을이 나오길래 우선 약국부터 찾았다.
어깨의 상처를 내보이자 약사는 처음에는 배낭에 쓸려 그런 줄로 알았다.
'베드벅, 베드벅' 이라니까 못 알아듣고 다른 약을 주려다 벌레에 물렸다는 표현을 한참을 하고 나서야
'아, 친체!' 라며 알아듣고 무슨 크림을 주었다.
8유로 가까운 거금을 주었다.
무슨 알러지 크림이었는데, 아마도 알러지 반응 때문에 가렵고 상처도 더 번졌던 것 같았다.
약국을 나와 옆 가게에서 과일과 간식을 사서 먹으며 다시 걸었다.
양 떼가 지나가는 동안 자동차들이 멈춰 선다.
어느덧 산티아고까지 300km 남짓 남았다.
하루 25~30km를 걷는다면 10여 일 정도의 거리이다.
빠르면 11월 말, 늦어도 12월 초에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그러면 피스테라까지 12월 5일 전후에 도착할 것이고, 이후에 내게 주어지는 시간은 보름 정도.
마음이 슬슬 포루투갈길로 향하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늑대'가 나올지 모른다는 옛 길로 접어들었다.
그저 막연하게 '지금 세상에 늑대가 말이나 돼..?' 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한낮인데도 인적 없는 들판은 어째 스산하고 무섭다.
늑대가 나온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늑대를 신경 쓰면서 걷고 있는데 이 길이 맞는 건지, 도대체 이정표가 보이질 않았다.
규칙적으로 보여야 할 화살표가 암만 눈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길을 되돌아 갈 수도 -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는 정말 싫다 - 없고,
이럴 때는 마을이나 도로가 있을법한 방향으로 주구장창 걷는 수밖에 없다.
아침부터 혼자 걸었기에 뤼노도, D도, 다른 사람도 안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농부 아저씨가 트랙터를 몰고 가고 있다.
트랙터를 세워 길을 물었다.
"돈데 에스따 까미노, 뽀르파보르?"
아저씨는 이 길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 맞다고 한다.
그러자 불안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안도가 밀물이 되어 몰려왔다.
생각해보면 웃긴 물음이다.
길을 걷고 있으면서 "길이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저씨는 내 처지를 알고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셨다.
나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 도 아닌 그저 '까미노'를 찾고 있었다.
힘들고 지치고 불안할 때, 확신에 찬 답을 얻으면 힘도 나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가운 화살표가 나타났다.
농부 아저씨에게 묻지 않고 이 화살표를 발견했다면 더 기뻤을까?
인적 없는 곳에 뚱하니 놓여있는 벤치에 앉았다.
'이런 곳에 벤치가..'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벤치였을 것이다.
'힘든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바나나도 까먹고..
멀리 보이는 반가운 이정표.
길벗 없이 걸었던 이 구간은 정말 긴장하며 걸었다.
길의 우측으로 도로가 나 있었지만 버려진 길이었는지 자동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았고,
좌측으로는 벌판이 펼쳐져 있어서 사방이 뻥 뚫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늑대가 있다면 정말 좋은 표적이 되겠네..'라는 영 뚱한 생각만 들었다.
아침에 '늑대'얘기만 듣지 않았어도 '넓고 광활하고 시원한 풍경이 정말 죽인다' 했을 텐데..
2시간여를 긴장 속에서 걸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야 일행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D도, 뤼노도 늑대에게 물려가지 않고 무사했다.
요한과 요한의 아버지 후안호, 해피호세,삐엘 그리고 베아는 다음 마을까지 가버렸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베아랑 조금 정들었는데 헤어져 아쉬웠다.
베아와는 처음을 '미운 감정'으로 시작해서 그랬는지,
이제는 만만하기까지 해서 '어떻게 곯려줄까..' 하며 여동생을 앞에 둔 못된 오빠가 된 것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가장 오래 함께 걸은 뤼노와도 외국인이기에 갖게 되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베아와는 그런 거리감이 더 적었다.
싸우면서 정든다더니(사실 싸운 적은 없지만) 베아가 없다니 조금 허전하기까지 했다.
베아와의 시작은 비록 '올ㄹ'였지만 나중은 '유 룩스 라이크 언 엔젤' 이었다.
그 뒤로 간간이 소식만 들었을 뿐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좀 더 친절하게 대해 줄걸..
이곳의 알베르게는 완전한 기부제이다.
돈통만 벽 한쪽에 걸려 있을 뿐 관리자는 보이지 않았다.
뤼노는 돈을 냈을까, 냈으면 얼마를 냈을까, 또 궁금해진다.
샤워를 하고 크림을 발랐다. 베드벅에 물린 곳이 시원해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제야 호스피탈레라가 등록 접수를 받고 있었다.
등록을 하려고 크레덴시알을 내밀었는데, 그녀가 유심히 보더니 뭐라 뭐라 했다.
전날 스탬프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라띠노스에서 깜빡하고 스탬프를 받지 않았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나 보다.
다행히 까미노 친구들이 증언을 해줘서 스탬프를 받을 수 있었다.
무사히 등록을 마치고 저녁 장보기에 나섰다.
알베르게 근처에 띠엔다(가게)가 있다.
저녁거리 외에 내일 먹을거리도 사서 뤼노, D와 나눴다.
매일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 디저트로 나눠줄 요거트를 D와 함께 샀다.
계산을 하는데 계산대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그 호스피탈레라.
본업은 가게 주인이고 봉사로 알베르게를 관리하는가 보다.
식사를 준비하며 죠셉의 포도주보따를 돌렸다.
헤럴드 할아버지의 까미노 친구 호세가 오믈렛을 만들었다.
감자를 갈고 달걀을 풀어 팬에 익힌 다음 접시로 팬을 덥고 뒤집으니
먹음직하게 도톰한 오믈렛이 완성되었다.
홀리안의 소빠(수프)에는 바게뜨를 썰어 넣었다. 이게 나중에 보면 꼭 비계처럼 보인다.
부르고스에서 먹은 소빠도 그랬는데.. 그게 빵을 썰어 넣은 것이었구나.
스페인 남자들은 요리도 잘하네.
호세의 오믈렛과 홀리안의 소빠, 그리고 내장탕 비스무레한 것으로 배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D도 맛있게 잘 먹었다.
헤럴드가 알베르게에 도착하고 나면 너무 피곤하다며
저녁 준비를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 연세에 이렇게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대신 친구 호세가 맛있는 오믈렛을 만들었잖아.
맛있게 먹는 우릴 보며 잉글리시 티쳐 헤럴드가 '헝거 이즈 더 베스트 소스'란다.
'시장이 반찬' 이라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맛있는 저녁이었다.
맛있게 먹는 우릴 보며 호세도, 홀리안도, 헤수스도 흡족해했다.
요리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맛있게 먹는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늑대가 있기는 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