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너의 피

엘 부르고 라네로 - 만실라 데 라스 뮬라스

by 외투




죠셉과 뤼노가 '유에베' 라면서 대기 중의 수분을 만지듯 엄지와 검지, 중지를 맞비볐다.

'유에베'. 비가 온다는 말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어제 먹고 남은 호세의 오믈렛을 바게뜨위에 얹어 '보까디요 꼰 오믈렛'을 만들어 먹었다.

이렇게 먹으니 맛도 색다르고 속도 든든하다.

티백 하나와 약간의 설탕을 따뜻한 물과 함께 보온병에 담고 달걀을 삶아 배낭에 넣었다.

모두들 비에 대비해 우비와 판초를 입고 배낭 커버를 씌웠다.

많은 비가 아니라 다행스럽게도'비니루 몸빼'를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우산을 썼다.

D의 판초가 멋지다.

월남스키부대원들이 입었다면 딱이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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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하늘만이 멀리 땅과 맞닿아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공허하고 쓸쓸한 느낌이었다.

마을이나 간이(?) 정류장에 선거벽보 같은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는데,

홀리안이 내일이 바로 스페인의 새로운 총리를 뽑는 투표일이라고 했다.

우리로 치자면 대선.

그렇다면 내가 걷기 시작한 후로 쭈욱 선거운동이 펼쳐졌을 텐데 우리와는 너무 달랐다.

후보의 벽보만이 선거를 알릴 뿐 유세도 집회도 보지 못했다.

부르고스나 빰쁠로냐 같은 큰 도시를 지나왔는데도 말이다.

까미노를 걷고 있는데 투표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홀리안은 '그놈이 그놈'이라며 하지 않겠다고 한다.

정치인이 존경받는 그런 세상은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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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면 자전거 순례자들은 더 힘들겠다.

자전거를 탄 순례자들이 '빨리 가서 미안해' 하는 느낌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하면서 지나갔다.

"부엔 까미노!"

이렇게 쭉 평지라면 달려볼 만하겠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잦아들고 쉼터가 나와 잠시 휴식.

계란도 까먹고 차도 마시고.

헤수스는 외모와는 안 어울리게 출판 분야에서 일했단다.

그래서 그랬는지 말도 재미있게 했고(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단어의 뜻에 대해 얘기할 때면 은근히 헤럴드를 견제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나중에 그 사람의 직업을 알게 되면 그동안 궁금했던 점이나 이해되지 않던 행동들이 이해되곤 했다.

헤수스는 내일 마드리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로그로뇨부터 함께 했는데 이제 이별이다.


알베르게를 출발한 지 3시간쯤 되었을 때, 정신 사나운 그림이 그려진 바르가 한 사람씩 삼켰다.


2011-11-19_12.13.jpg?type=w740 D의 판쵸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이곳은 내부가 온통 낙서로 도배되어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낙서가 가능한 곳은 모두 낙서로 도배되어있다.

아니, '도대체 저기엔 무슨 수로 낙서를 했을까'싶은 곳에도 낙서가 되어 있었다.

물론 한국어도 한몫 아닌 두세 몫을 하고 있었다.

베레모를 쓴 주인아저씨가 밝게 반겨주었다.

'까미노 명물' 스런 아저씨는 유쾌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즐겁게 만든다.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사진도 찍고 말도 잘 받아준다.


IMG_0719.jpg?type=w740 노란 죠셉 파란 홀리안 빨간 헤수스


스페인의 바르에서 마시는 까페 꼰 레체.

1유로 안팎이면 주문과 동시에 '치이익-' 소리와 함께 비스킷이나 작은 빵조각이 곁들여 나오는데,

이 맛이 아주 그만이다.

커피맛을 모르는 나도 반했으니까.

그윽하면서도 적당히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까미노'라는 특수한 환경이라 그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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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수스도 죠셉도 새직장을 찾아야 할 텐데..

남 걱정하고 있네.

요즘은 어딜 가나 경제, 경제 한다.

경제가 최우선이다.

정부나 사회나 언론은 모든 관심을 '경제'쪽으로 돌리고 있다. 거의 맹목적으로.

까미노를 걷는 동안 뤼노와 '행복한 인생'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눴다.

어떻게 그런 대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귀 모자급 영어로.

그 당시에는 꽤나 심각하게 얘기하느라 머리가 아프기까지 했다.

경제적인 여유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게 핵심은 아니라는 당연한 얘기.

행복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그런 얘기.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더 힘들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그때가 좋았지..' 하면서.


만실라에 일찍 도착했기에 다음 마을까지 갈 줄 알았는데,

이곳 알베르게에는 부엌이 있었기에 뤼노가 머물길 바라는 눈치다.

살짝 짜증이 났지만 그냥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 레온까지 가는데, 여기서 더 가버리면 내일은 정말 얼마 걷지를 못하게 된다.

D가 '꼬시나, 꼬시나' 해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바로 '부엌'이었다.

경상도 억양으로 '꼬시나' 하니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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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작은 광장에는 순례자 조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지친 남자 친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여자' 정도로 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자의 손에는 빵조각 같은 게 들려있고 남자가 배낭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려하고 있다.

'마실 거 줄까, 와인?' 하면서.

바라보는 여자의 표정이 행복으로 가득하다.

염장질 하는 조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편에는 한 지친 남자가 홀로 좌절모드로 계단에 엎드려 뻗어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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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가 오늘 집으로 돌아간다기에 헤럴드는 호세의 가족과 만나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단다.

호세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만나서 기뻤다'며 안아주고 헤럴드와 멀어져 갔다.

호세는 로그로뇨에서의 냉동 오믈렛으로 인한 나의 오믈렛에 대한 편견을 깨 주었다.

따뜻하고 짭짤하고 부드럽고 두툼한 스페인식 오믈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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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피는 순수해


알베르게는 좁은 골목 사이에 있었다.

좁은 골목에 어울리게 아담한 2층 집이었는데 나무계단도 세월을 말해주듯 반질반질했다.

비에 젖은 배낭과 우비들을 한쪽에 치워놓고 등록을 하려는데 호스피탈레로가 없다.

대신 다른 봉사자가 있었는데 이곳의 호스피탈레로가 '의사'라고 했다.

이곳에 머물길 잘했네.

지겨운 베드벅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하며 기다렸다.

이윽고 호스피탈레로가 도착했는데 그녀는 수의사?!

하긴 수의사도 의사는 의사지.

게다가 어쩌면 베드벅에 더 특화된 의사일 수도 있다.

베드벅과 동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니까.

"유어 블러드 이스 굿, 퓨어!"

그녀가 베드벅 상처를 보고 나서 한 첫말이었다.

'네 피가 깨끗해서 그래'

그걸 위로랍시고..

그러나 수의사 아줌마는 아주 명쾌한 처방전을 내려주었다.

베드벅은 섭씨 47도 이상이면 죽으니, 큰 도시에 가면 옷가지를 몽땅 건조기에 넣고 말려버리라는 것이었다.

마침 내일 레온에 도착하니 잘 되었다.

연고는 잘 샀다면서 계속 바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굳이 인터넷을 뒤져서 '친체(베드벅)'를 찾아 보여준다.

'으악! 저런 괴물이 내 몸을 기어 다니고 있다니..'

괜히 봤다. 어째 더 근질근질해진다.

이 수의사 아줌마가 약 주고 베드벅주네.

어쨌든 그녀는 내가 베드벅과 함께 다닌다고 문전박대하거나 격리시키거나 하지 않았다.

알러지크림을 바르는데 손이 닿지 않는 등짝은 D가 도와주었다.

D가 정말 고맙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행여나 옮을까 경계를 했을 텐데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모두 각자 저녁을 해 먹는 분위기.

그동안 얻어먹기만 한 게 미안해서 D와 힘을 모아 일행에게 한국식 밥을 대접하기로 했다.

마트에 갔는데 마땅한 요리 재료가 없어 볶음밥을 하려고 햄과 양파 등을 샀다.

밥만 지었지 요리를 해봤어야지.. 양파를 볶는데 좁은 주방 안에 있던 몇몇은 눈이 매운지 슬금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요란 떨며 완성한 볶음밥은 별로였다.

한국식 밥을 해주겠다고 했던 게 무안해 "저스트 푸드.. 이츠 낫 코리안 푸드."라고 했는데,

그래도 모두들 한 접시씩 비웠다.

더 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불행(?)하게도 헤럴드는 저녁을 먹고 들어와 '그냥 음식'을 맛볼 수는 없었다.


헤수스의 송별식을 위해 근처의 바르를 찾았다.

내일이 총리 선출 투표일인데도 바르에서는 축구 중계가 한창이었다.

헤수스의 추천으로 나는 '오루호'를, D는 쎄르베싸(맥주)를 마셨다.

잔술을 시키면 하몽이나 치즈 같은 간단한 안주거리도 딸려 나온다.

오루호는 스페인 전통술 인가 본데 달착지근하고 진득하며 독했다.

소주잔 크기의 작은 잔으로 한잔 마셨는데 바로 올라와 알딸딸해진다.

맥주도 좋았다.

우리 맥주보다 더 부드럽고 시원한 맛을 냈다. 다행이다.

우리 맥주 맛이 그랬다면 꽤나 마셨댔을 걸.

조용한 마을이었지만 바르 안은 사람들도 많았고 떠들썩했다.

간단히 한잔씩만 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헤수스가 마드리드에 오게 되면 연락하라며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떠나간다.

창밖을 보니 비 내리는 골목이 가로등 불빛에 촉촉하다.

비와 잘 어울리는 알베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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