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속도

산 마르틴 델 까미노 - 아스토르가

by 외투



싱글 침대 두 개가 놓인, 외국영화에서나 보던 허름한 시골 모텔 느낌의 알베르게.

일어나자마자 창문 블라인드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조금.

뤼노의 아침인사가 없으니... 더 일찍 있어났네.

그동안은 뤼노를 방패막이로 하루를 시작했었다.

뤼노가 자리를 정리하면 따라서 정리를 하고, 세수를 하면 따라서 세수를 하고..

아침 먹자고 하면 아침을 먹었다.

이제는 따라 할 사람도 없고..

프란시스코는 코는 안 골았지만 간밤에 앓는 소리를 냈다.

'끙 끙..'

연약해 보이는 데다가 까미노 첫날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안토넬라, 프란시스코, 사요꼬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빵과 잼, 버터, 주스까지, 푸짐하다.

이번엔 나도 '레체 꼰 카페'.

주인아줌마가 남은 마들렌을 챙겨가라고 한다.

도도한 안토넬라는 안 챙길 줄 알았는데 우아하게 2개 정도를 챙겼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고 각자 출발.

"부엔 까미노"

"아스따 루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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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고 생각하고 먹고 쉬고.. 나름 고독을 즐겼다.

뤼노와 있을 때는 안 그랬나.

걸을 때는 혼자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중간의 마을이나 알베르게에 도착해서야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혼자 걷는 건 마찬가진데 든든한 베이스캠프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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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다리를 건너 마을이 보였다.

개울물이 참 맑다.

우리 동네 중랑천과는 비교가 안된다.

때 묻지 않은 자연.

공기도 맑고 매연이나 먼지도 적어 옷도 때가 덜 탔다.

먹을거리를 사야겠다.

다리를 건너 금방 가게가 나왔는데 큰 마트가 있을까 하고 지나쳐 걸었더니 금세 마을 끝이다.

발길을 힘들게 되돌렸다.

얼마 안 되는 길인데도 되돌아 가는 건 정말 힘들다.

토마토와 빵, 통조림 등을 사서 배낭에 넣고 다시 걸었다.


마을 끝에서 까미노가 두 갈래로 나뉜다.

길바닥에 직진해도 까미노, 우측으로 가도 까미노라고 씌어있다.

도로를 따라 난 직진 길을 선택했다.

거리가 짧을 것 같아 선택했는데, 도로를 따라가는 길이라 풍경도 그렇고 지루했다.

실제로 거리가 짧더라도 풍경이 개떡 같으면 더 힘들다.

차라리 조금 돌아가더라도 예쁜 풍경을 선택할걸.

한참을 걷다가 다시 마을로 들어가는 길로 갈아탔다.

벤치가 나와 얼른 앉았다.

아이고 다리야.. 어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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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던 마을 어르신이 아주 작은 몸짓으로 인사를 건네신다.

그 단순한 행위도 힘겨워보였는데, 방심했으면 인사인지도 모를뻔했다.

아주 귀한 인사를 받았다.

인생의 순례길에서 얼마 남지 않은 지점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가신다.

바게뜨를 가르고 통조림을 따서 정어리와 마늘을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정어리에 맛 들이니 참치보다 맛있다.

토마토소스에 버무려진 정어리와 마늘이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룬다.

이제 배가 고파도 식당을 찾지 않는다.

앉을자리만 있으면 그냥 만들어 먹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뤼노가 아주 몹쓸 버릇을 들여놓았다.

어른들께서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친구를 잘못 만나 길거리에서만 음식을 먹고 있으니..


마을을 통과해 작은 언덕을 넘어가니 안토넬라가 보였다.

그녀는 타이머를 맞춰놓고 혼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서로 사진을 나누며 잠시 쉬었는데, 신발을 보더니

"오우 쎄임!"

그러고 보니 신발이 똑같네.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같은 신발의 사람과 만날 확률은.. 한 53,000분의 1쯤 되려나.

'발가락이 닮았다' 가 아닌 신발이 똑같네.

한국에서는 같은 옷이나 신발을 보면 괜히 멀리하는데, 여기서는 반갑다.

안토넬라의 것은 벨기에부터 신고 걸었기에 많이 헤져서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었다.

영광의 상처.

그런 신발이 멋지다.

어렸을 적엔 새신에 때가 탈까 애지중지했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때 묻고 헤져야 좋다. 발도 편하고.

얼마나 걸었는지를 신발이 대변해주고 있다.

얼마나 더 걸어야 안토넬라의 것처럼 멋지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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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무인 가판대를 지나왔다.

이 시기에 과연 장사가 될까?

정말 무인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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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안토넬라는 사뿐사뿐 발걸음도 우아하고 가볍게 잘 걷는다.

할머니라니.. 말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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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속도로 걸었더니 조금씩 안토넬라로부터 뒤쳐졌다.

그래도 내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조금만 과속을 하면 나중에 탈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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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할머니한테 뒤쳐지다니..

'속도를 내볼까' 하고 빨리 걸어보았다.

그런데 거리가 좁혀지지 않네.

'에이 여기까지 와서 뭐 하는 거야..' 금방 접었다.

언덕 아래 저 멀리 아스토르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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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내려와 주택가를 지나 건널목을 건너서 아스토르가 중심으로 들어선다.

까미노는 주택가의 뒷길로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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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많기는 많은가 보다. 간판에 한글까지 있으니.

반갑기는 한데 글씨체는 별로.

더 예쁜 글씨체가 많은데..


아스토르가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와 언덕을 돌아 오르면 왼편에 숙소가 있다.

숙소는 병원 같기도, 성당 같기도 했다.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음악이 은은하게 계속 흘러나왔다.

안내데스크에서 등록을 하고 들어가는데... D가 나온다!

전날 인기척 없던 바로 그 무니씨팔알베르게에서 머물렀다고 했다.

어제 둘러보기만 하고 들어가 보지는 않았는데.. 들어가 볼걸.

작별 인사한 지 하루 만에 다시 만났다.

D는 오늘 동갑내기 O를 만났단다.

O는 부산에서 왔는데 역시나 혼자.

여자들이 용감하다.

나는 혼자 떠나기 전까지 많은 걱정과 염려로 불안했었고 지금도 불안한데

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녀들도 나처럼 불안했을까?

홀리안과도 다시 만났다.

발목이 완쾌된 죠셉은 다음 마을까지 가버렸단다.

O는 전날 '오스피딸 데 오르비고'에서 죠셉과 홀리안하고 함께 머물렀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완전 공주대접을 받았다.

O를 꼼짝 못 하게 하고 음식을 해주었단다.

내게는 안 그러더니..


안내데스크의 호스피딸레라에게 잃어버린 일기장에 대해 얘기했더니

선뜻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알아 봐준다.

브루고스에서의 자리만 지키고 앉아있던 녀석과는 너무 달랐다.

찾지는 못했지만 고마웠다.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안내데스크 곁에서

IT강국, 한국의 아들딸답게 나, D, O 우리 셋은 휴대폰을 붙들고 인터넷 세상을 걸었다.

내게도 메쎄지가 와있다.

급하게 회사를 그만두면서 인수인계도 제대로 못했는데,

후임으로 온 길대리에게서 온 메쎄지다.

딱히 인수인계라 할 것도 없었지만 그나마 거래처도 제대로 전해주지 못했었고,

물품구매 때문에 메쎄지를 보낸 것이다.

불쌍한 길 대리. 나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잽싸게 인터넷 세상을 헤집고 뒤져서 알려주었다.


마을을 둘러보려고 알베르게를 나오는데 그제야 프란시스코가 막 도착한다.

계단을 오르며 '오 마이 니(아이고 무릎이야)..' 하는데, 그 소리가 마치 '오마니..' 로 들린다.

아스토르가에는 초콜릿 박물관과 가우디의 건축물이 있었다.

두 곳 한꺼번에 관람하면 5유로, 한 곳만 하면 3유로.

망설이지 않고 가우디에 거금 3유로를 질렀다.

처음엔 이 '가우디'가 그 '가우디' 맞나.. 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아직도 짓고 있다는 무슨 성당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빌라(?) 정도라 기대도 않고 있었다.

스페인까지 와서 가우디의 작품을 못 보고 돌아가는 게 억울했는데,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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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의 명성이 대단한 이유를 알겠다.

척 보기에도 눈길 가는 외관에 내부도 화려했지만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찍지는 못했다.

기둥 하나하나가 어찌나 섬세하고 아름답던지..

층층마다, 방마다 '요놈이 사진을 찍나..' 하는 눈초리를 한 감시원들이 있다.

마침 문 닫을 시각이 가까워 '요놈이 빨리 안 나가나..' 하는 것 같았지만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며 눈에 담았다.

이렇게 꼼꼼하고 아름답게 완성하려면 웬만큼 독하지 않고서는 택도 없겠다.

건물에서 나오며 드는 생각은 '가우디는 독한 사람이었을 거야..'였다.

사진상으로 봤을 때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들이 친근하게 느껴졌었는데

실제로 보니 하도 꼼꼼하고 정교해서 정나미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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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국인이 3명으로 가장 많았다.

스페인 2명(홀리안, 프란시스코), 러시아 1명, 독일 1명, 포르투갈 1명, 스위스 1명(코넬), 이탈리아 1명(안토넬라), 그리고 사요꼬가 가장 나중에야 도착했다.

사요꼬, 정말 대단하다. 정말 기모노 차림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저녁은 D와 O가 사 온 식재료로 해 먹었다.

음식을 가득 펼쳐놓은 식탁에 나는 달랑 하몽 몇 조각 들고 앉았다.

한켠에서는 까를로스(포루투갈)가 요리를 하는데 보조가방 하나가 온통 먹을 것으로 가득했다.

버섯을 꺼내 볶는다.

이야 까미노 중에 버섯요리를 다 해 먹다니.. 근사한데.. 부잔 가봐..

O가 농담 삼아 그런다. '저런 애랑 친해야 하는데..'

동감이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왔더니 홀리안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저녁 먹었느냐'라고 물으니 먹었단다.

그러고 보니 주방에서 보지 못했는데, 밖에서 사 먹고 들어왔나..

죠셉이 없어서 그런가.. 어째 풀이 죽은 표정이다.


2층 침대 6개가 꽉 찼다.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사람들인지..

레온 전후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침낭 속으로 들어가 건너편의 프란시스코와 인사를 나눴다.

'부에나스 노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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