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

사모스 - 포르토마린

by 외투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려는데 누군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차가운 날에 온수도 나오지 않는 이곳에서 샤워를 하다니!

기가 죽어 소리를 죽여가며 양치하고 물 좀 찍어 묻히고 세수를 마쳤다.

잠시 후 샤워실에서 나온 사람은.. 타냐였다.

누가 '프럼 러시아' 아니랄까 봐..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 상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버너로 우유를 데우고 물을 끓여 커피를 끓여마셨다.

타냐도 합세했다. 그녀에게도 버너가 있었다.

까를로스의 버너보다 작았지만 성능은 더 좋다.

까를로스도 살짝 기가 죽었다.

타냐가 아침부터 여럿 기죽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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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와 타냐는 무슨 씨앗말린가루 같은 것을 더운물에 타서 먹었다.

씨리얼도 아닌 게.. 죽 비슷했는데 담백하고 뱃속이 편해지는 기분.

음- 이거 씨리얼보다 부피도 작은 데다 가벼워 괜찮겠는데. 다음에 나도 시도해봐야겠다.

지금 알았는데 오트밀이었다.

간편하고 가볍고 무엇보다 속이 편안했다.

프란시스코가 먼저 출발하고 노리꼬, 카를로스와 함께 알베르게를 나섰다.

반가운 소식 하나.

까를로스에게 돈이 생길 것이라고. 형이 100유로를 부쳐주기로 했단다.

그 돈이면 산티아고까지 가는데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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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코앞이라 조금씩 기온이 떨어지고 있다.

포루투갈길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라 추위도 피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겨울을 피해 남쪽으로 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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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42km 남았다.

넉넉잡아도 일주일 안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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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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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정글을 헤쳐 나가듯 나무를 타 넘고 조심해서 통과했다.

'기모노 사요꼬는.. 어떻게든 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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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내려와 작은 마을로 접어들었다.

갈리시아 지방 특유의 지붕이 이채롭다.

물고기 비늘 같은 지붕은 얇은 돌판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위에 삼겹살을 구우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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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아에 도착해서 프란시스코와 타냐를 만났다.

둘은 '빠나데'라는 빵을 먹고 있었는데 아주 맛있다며 파는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노리꼬가 갓 구운 빠나데를 사서 삼등분했다.

두툼한 피자 같은 따뜻한 빵 속에 카레 비슷한 소스와 고기가 들어있었는데 맛이 좋다.

프란시스코, 또 고기를 먹었나 보다.

하루 가벼운 산보라면 모를까, 매일매일 누적되는 피로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배낭을 내려놓으면 발, 다리, 어깨, 허리.. 온몸이 뻐근했다.

몸 관리도 잘 해야 하고 먹기도 잘 먹어야 한다.

자연스레 단것이 당기고 고기도 찾게 된다.

그래서 프란시스코도 '포 에네르기 포 에네르기' 하면서 싫어하는 육식을 하는 것이다.

정말 고기를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행에 들어갔던 까를로스가 돈을 찾아왔다.

100유로를 기대했는데 60유로. 형님이 생각보다 적게 보내줬다.

하지만 5유로만으로도 며칠을 버틴 까를로스이기에 산티아고까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이제 인간 빈대 걱정도 끝!

돕는 것도, 도움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까를로스 자신도 많이 미안했을 것이다.

노리꼬라면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그런 게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형이 돈을 부쳐준다고 했을 때 어쩌면 까를로스보다 내가 더 기뻐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퍼메르카도에 들어가 식료품을 샀다.

제법 큰 가게라서 100유로짜리를 내고 잔돈으로 거스름돈을 받았다.

50유로짜리와 20유로짜리가 있었지만 미리 돈을 바꿔두는 게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까를로스도 떳떳하게 쇼핑을 했다.

초콜릿부터 집어 들었다. 그동안 초콜릿이 고팠나 보나.


사리아 시내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는 가족을 보았다.

내 또래의 부부와 아기 하나.

아빠의 자전거 뒤에 캐리어를 달아 아기도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갓 걸음마를 뗀 아기와 함께 하는 자전거 여행이라.. 부럽다.

한편으로는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사리아를 벗어나 시골길을 걸었다.

함께 걷는데 노리꼬가 길에서 벗어나며 먼저 가라고 했다.

"왜?" 그랬더니 "퍼블릭 또일렛" 이라며 먼저 가란다.

"아스따 루에고"

앞서서 한참을 걷다가 커다란 샘이 나와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휴식.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물병도 채우고 앉아있었더니 어느새 노리꼬가 온다.

사과 한쪽을 나눠먹고 노리꼬 먼저 출발, 한참 뒤 까를로스가 왔다.

남은 사과 한쪽마저 나눠먹고 출발.

걷다 보면 까를로스가 자꾸 뒤로 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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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파 낮은 돌담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보까디요를 만들어 먹었다.

빵을 가르고 햄을 넣고 안토넬라가 알려준 치즈를 넣고 한입, 그리고 보온병에서 따뜻한 '레체 꼰 까페'를 따라 마셨다.

사방이 밭이라 고향의 향기(?)가 물씬 풍겼지만 맛있게 먹었다.

출발할까 하다가 보까디요를 하나 더 만들어놓고 까를로스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까를로스가 지친 모습으로 배낭을 내려놓고 옆에 앉는다.

'보까디요 데 상한'이라며 보까디요를 내밀었다.

'보까디요 데 노리꼬'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엔부엔' 하며 맛있게 먹는 까를로스.

습관적인 '부엔부엔'.

노리꼬가 선천적으로 따뜻한 마음이 많은 사람이라면 나는 계산적이고 인색한 편이다.

학습과 경험에 의해 남에게 욕먹지 않는 방법을 습득한 정도.

그나마 급할 때면 본능적으로 속마음이 드러나버려 혼자서 흠칫 놀랄 때가 많았다.

'아 내가 이렇게도 얍삽한 인간이었던가..'

비록 하루 묵어 눅눅하기까지 했던 '보까디요 데 노리꼬' 에는 따뜻한 온기가 담겨있었다면,

금방 만든 '보까디요 데 상한'은, '상한 보까디요' 까지는 아니래도 편의점의 차가운 삼각김밥 정도나 됐을까.

출발하기 전 도저히 이 상태로는 까를로스가 포르토마린까지 못 갈 것 같아서,

경험과 학습으로 습득한 '배려'를 한번 더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까를로스의 배낭을 한번 들어 보았더니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내 배낭이 '미친 배낭'이라면 까를로스의 배낭은 '완전히 돌아버린 배낭' 정도 되겠다.

바꿔맬까.. 했지만 도무지 엄두가 안 났다.

짐을 나누기로 했다.

완전히 돌아버린 배낭을 열어보니 작은 주머니 하나가 묵직했다.

바로 자전거 수리공구다. 쇠로 된 공구들이 들어있으니 무거울 수밖에.

공구주머니를 내 배낭으로 옮겨 담았다.

나의 미친 모칠라(배낭)가 정말로 미칠라고 했다.

그리고 출발.

조금은 까를로스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조금은 나의 어깨가 비명을 더 지르는 것 같았다.

마음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계속 짓눌려온 까를로스의 어깨에 비하면 내게는 잠깐의 색다른 무게(?) 정도의 느낌이다.

물론 계속 이렇게 매고 다니라면 미쳐버릴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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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한 달이 안 남았는데.. 초승달을 나무 꼭대기에 걸어놓고 한방.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도 '까미노 데 노체'.

화살표도 잘 보이지 않는 고요하고 거룩하고 어둠에 묻힌 길을 더듬더듬 걸었다.

할 말도 없고 지치기도 했고.. 무작정 걷기가 지루하고 힘들어 휴대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

까를로스는 '봅몰리'의 음악을 좋아했다.

봅몰리 봅몰리 하길래 봅몰리가 누군가 했더니 바로 밥 말리다. 레게 가수 밥 말리.

하지만 내 휴대폰에 봅몰리의 노래는 없었다.

가요와 팝이 대부분인데 까를로스가 좋아하려나?

이어폰을 꽂고 혼자만 듣기보다는 같이 듣고 싶어 볼륨을 최대치로 하고 틀었다.

다행스럽게도 '뜨거운 감자'의 노래를 좋아한다. 기타 소리가 좋다나..

그중 '맛 좀 봐라'의 후렴구는 따라 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까를로스 '뜨거운 감자'의 '김C'를 닮았네.

"마춤바라 마춤바라..."


그렇게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걷고 있는데 까를로스의 휴대폰이 울렸다.

포르토마린에 먼저 도착한 노리꼬가 걱정이 되었는지 전화를 한 것이다.

저녁거리는 물론 포도주까지 준비해놨으니 어서 오라고.

내 휴대폰의 음악이나 '보까디요 데 상한' 보다는 노리꼬의 전화 한 통에 힘을 내어 걷는 까를로스다.

멀리 포르토마린으로 짐작되는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야간 까미노의 말미에는 불빛을 향해 그냥 직진!

화살표고 나발이고.. 다 무시하고 그냥 불빛을 향해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도로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산길을 걷다가 차도를 따라 걷다가..

포르토마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높다란 다리를 건너는데 캄캄한 다리 밑의 강물이 아득했다.

다리를 건너고 계단을 올랐다.


8시가 넘어서야 포르토마린에 도착했다.

까를로스도 당당하게 숙박비를 지불했다.

노리꼬와 프란시스코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곳 알베르게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20명도 넘는 것 같았다.

알베르게는 비교적 깨끗했지만 침대를 배정받고 짐을 풀기 전 침대 주위를 살펴보았다.

모서리 벽 쪽에 검은 반점 같은 게 있어 혹시 베드벅은 아닌가 하며 유심히 보았는데 아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노리꼬가 웃었다.

이곳도 역시나 샤워실에 칸막이는 되어있지만 문도, 커튼도 없다.

이게 갈리시아 스타일인가.. 하여간 뭔가 허전해.



반칙


이곳에서 한국사람을 4명이나 만났다. 남자 하나 여자 셋.

그중 M은 정말 건장한 대한민국 청년이다.

키도 크고 늘씬한 게 유럽인들과 견주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체격이다.

하루에 60km를 걸은 적도 있다고 했는데 벨트 색에 조그만 태극기가 박음질되어 있었다.

포루투갈길을 걸어 산티아고를 찍고 생장으로 가고 있는 중이란다.

포루투갈길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데, 프랑스길은 역방향이라 길 찾기가 만만치 않아 길을 많이 잃었다고 했다.

자기는 필요 없다며 포루투갈길의 알베르게를 정리해서 코팅한 종이를 내게 주었다.

사람이 드물어 알베르게에서 혼자 잔적도 몇 번 있었다고 했다.

M은 산티아고에서 거금을 주고 방수 바지를 샀다면서 빨리 비가 와서 성능 실험을 하고 싶단다.

나도 돈 좀 더 주고 괜찮은 걸로 살걸.. 싼 맛에 구입한 '비닐 몸빼' 때문에 스타일만 구겼었다.


한국 여자분 중 한 명이 발목에 붕대를 감고 절룩였다.

인대를 다쳤다고 했는데 내일은 아무래도 걷지 못하고 택시를 이용해야 할 것 같다며 '반칙이지만..' 그런다.

에이 반칙이 어디 있어.

걸어서 완주하지 않았다고 해서(물론 조금은 아쉽지만), 산티아고까지 가지 않는다고 해서(역시 조금은 아쉽지만) 반칙은 아니다.

그게 반칙이라면 호텔에서 자는 것도, 배낭 배달 서비스도, 맛있는 '메뉴 델 디아'도... 모두 반칙이게.

또, 베지터리안이라며 매일매일 꼬박꼬박 고기를 챙겨 먹은 프란시스코는 그럼 진작에 경고 누적으로 퇴장에, 퇴출까지 당했게?

그 여성분도 농담삼아 한 말이겠지만, 오히려 아픈 몸을 무리하게 혹사시키는 게 내 몸에 대한 반칙 아닐까.


구슬 주머니와 실을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묵주를 만든다는 M은 식사를 하는 우리 옆에서 묵주를 만들었다.

주방은 크고 좋았지만 그릇이 부족했다.

점점 산티아고에 가까이 갈수록 주방의 식기를 뺀다는 말에 모두들 불만이다.

특히 프란시스코는 '식기는 정말 중요한데..' 라며 불만이다.

산티아고가 가까워지면서 장난 삼아, 기념 삼아 식기를 가져가는 사람들이 생겨서 취해진 조치란다.

혹은 지역 경제활성화 때문에 사람들을 식당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라기도 했다.

할 수 없이 작은 그릇에 파스타를 나눠먹었다. 노리꼬가 준비한 포도주도.

M이 휴대용 젓가락을 빌려줘서 편하게 먹었다. 며칠 만에 하는 젓가락질인지 반갑다.

설거지를 끝내고 노리꼬 기지국을 이용해 위피를 사용하는데 또 다른 한국 여성분이 좀 써도 되겠느냐며 내 휴대폰을 빌려간다.

포도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달나라'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하니까 까를로스가 달나라에는 토끼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다고 했다.

포루투갈의 많은 사람들이 달의 이면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믿는단다.

아니라니까, 토끼가 산다니까 그러네..


까를로스가 네 잎 클로버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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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팅이 되어있었는데, 뒷면에는 중국 속담이 적혀 있었다.

'현명한 사람은 개미집 위에 앉을 수 있지만 바보는 그 개미집 위에 앉아 있다.'

현명한 사람은 개미집 위에 앉았다가도 일어설 수 있지만 바보는 그 개미집 위에 앉아 있지만 다른대로 이동할 생각이 없다, 뭐 그런 내용이란다.


10시가 되자 주방의 불이 자동으로 소등되었다.

모두들 불만이다. 이거 반칙 아냐?

까를로스의 랜턴과 내 해드 랜턴을 켜고 정리를 했다.

휴대폰을 빌려간 여성분이 눈치 없이 아직도 카톡 중이다. 노리꼬도 피곤한 눈치였는데.

불만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반칙이라면 반칙일 수 있겠다.

주방을 나와 모두 잠든 불 꺼진 침실로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가 2층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잠든 이들을 방해하는 것도 반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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