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스 데 레이스의 홍반장

테오 - 까다스 데 레이스

by 외투



내가 일어났을 때 싼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은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들은 열쇠를 내게 건네주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부엔 까미노"


이제 잠시나마 알베르게는 내 차지다.

길 위에서의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느긋하게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피스테라를 포함해서 몇 번이면 충분하다.

어제 먹고 남은 밥으로 눌은밥을 해 먹었다. 반찬은 하몽 구이.

짭짤한 게 반찬으로 먹기엔 괜찮다. 하몽만 먹으면 너무 짜.

차를 끓여 마시고 보온병에도 담았다. 설탕 한 스푼은 필수.

아침에 부리는 여유가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여유는 사람들이 없기에 가능하다.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없으니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느긋하게 설거지를 하고, 위층에 올라가 짐을 정리하고, 불을 모두 끄고, 난방 스위치도 내리고..

내가 머물렀던 흔적을 없애고 내려왔다.

알베르게를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아늑하고 고요한 공간을 더 누리고 싶었다.


푸근한 아저씨를 위해 어제 방명록에 적었던 메모 위에 '띠엔다'표 귤 하나를 올려놓았다.



열쇠를 우체통에 넣고.. 길을 나섰다.

어제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화살표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싼티아고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



역시나 오늘도 아침부터 길을 잘못 들 뻔했다.

나의 '포르투갈'이라는 발음이 시원찮은 건지 아니면 이들에게 '까미노'란 무조건 싼티아고로 향하는 길인지 자꾸 나더러 돌아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께서 싼티아고가는 길은 '여기'라고 알려주면 아예 반대로 걷기도 했다.



검고 큰 달팽이가 가끔 보였다. 조금 징그럽기도 했는데 그 빛깔이 참 예뻤다.

길을 알려주는 화살표도 조금 다른 모양이다.

'까미노 다 파드로니아' 라고 쓰여 있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따라갔다.

노란 화살표와 조가비 표시, 그리고 파란 화살표를 번갈아 가며 길잡이로 삼았다.

아직 파란 화살표는 드문드문 보였다.



점점 촌구석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마을의 어느 성당에서 장례식이 있었는지 검은 옷의 사람들이 나왔다.

성당 옆에서 잠시 쉬어갈까 했지만 아무래도 장례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배낭을 메고 여행자 복장으로 있자니 신경이 쓰였다.

좀 더 가서 쉬자.



성당 앞으로 난 건널목을 건너는데 멀리서 기차소리가 들렸다.



오래되어 이끼 낀 성당 앞으로 현대식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기차나 버스나 빠른 교통수단이지만 그 느낌이 다르다.

왠지 기차는 '여행'과 잘 어울린다.

버스는 싫은데 기차는 타고 싶다. 버스는 피곤해.


12시경에 파드론에 도착했다.

포루투갈길에 들어선 뒤 싼티아고 이후로 처음 만나는 도시다운 첫 도시.

싼티아고보다 덜 번화한 만큼 더 차분했다.



다리 건너 길모퉁이에 만만하게 보이는 바르가 있길래 들어갔다.

작고 깨끗하다.

바르에는 몇몇 마을 어르신들이 커피를 마시거나 신문을 보고 계셨다.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몽은 입에 잘 맞지 않아 햄이 들어간 보까디오를 메뉴판에서 가리켰다. 그리고 커피 한 사발.

주인아주머니는 빵을 따뜻하게 데워 주셨다.

따뜻하고 커다란 보까디오가 참 맛있다.

빵까지 따뜻한 보까디요는 드물었는데 부드러운 게 너무 좋았다.

이제 딱딱한 바게뜨에도 제법 익숙해졌지만 따뜻하고 폭신한 빵이 더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싸고 맛있고 배부른 음식은 여행자에게 크나 큰 힘이 되어준다.

게다가 친절한 주인이라면 금상첨화.

'음 이번 선택은 아주 좋았어!' 마음까지 배불러진다.

숨겨진 맛집을 발굴한 기분.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보까디오를 맛있게 잘 먹는지 은근히 지켜보았다.

허겁지겁 와구와구 쑤셔 넣으며 걸신들린 것 마냥 먹지는 않았지만 한입한입 꼭꼭 씹어 맛있게 먹었다.

충분하게 먹고 쉬고 바르를 나오는데 아줌마가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며 카메라를 꺼냈다.


"씨!"



바로 오렌지색 차양의 바르이다.

사진을 보면 비온 뒤의 큼큼하고 상쾌했던 공기와 분위기가 살짝 되살아 난다.

에너지를 보충하고 나서 파드론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작은 강을 끼고 있는 파드론이, 아주머니의 따뜻한 친절이 더해져서 더 정겨워 보였다.




싼티아고에서도 그랬지만 도시를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도시를 나가는 길이 여러 갈래이고 역방향을 안내해주는 화살표가 없기 때문.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는 답변뿐이었다.

겨우 길을 찾아 파드론을 빠져나왔다.


몇 번이나 길을 잃었는지 모른다.

잠시만 방심하고 걸으면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서 걸어도 길을 잃기가 쉽다.

하긴 프랑스길에서도 순방향임에도 길을 잘못 드는 경우도 있었는데 역방향의 푸루투갈길에서는 어련할까.



까미노는 숲으로 이어졌다가 작은 동네의 골목골목을 구석구석 헤집으며 이어졌다.

쉬고 싶어 질 무렵, 길은 나를 대로변의 한 알베르게 앞에 토해놓았다.

'피노'였던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데 무니시팔 알베르게였다.

아담하고 깨끗한 건물이 마음에 들었지만 외딴곳이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가게도, 바르도..

창문 넘어 기웃거려보니 사람도 없다.

건물 앞 놀이터에 앉아 간식을 먹고 좀 더 걸어 다음 마을인 '까다스 데 레이스' 까지 레이스를 더 하기로 했다.


6시가 조금 넘어 까다스 데 레이스에 도착했다.

까다스 데 레이스는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도시라고 하기에는 작아 보였다.

역방향은 알베르게 찾기도 쉽지 않다.

두리번거리다가 신문을 말아 쥐고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가고 있는 한 아저씨를 붙잡고 '무니시팔' 알베르게가 어디냐고 물었다.


"돈데 에스따 알베르게, 무니시팔?"


그는 이곳엔 무니시팔이 없다고 했다.

대신 '공식 지정(official)' 알베르게가 있다며 그리로 안내해 주겠단다.

안내책자에서 분명 공립 알베르게를 본 것 같았는데..

속으로 '이거 알베르게 호객꾼 아냐?..' 하며 의심 섞인 마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씽꼬유로, 씽꼬유로(5유로)'를 강조하며 아저씨가 안내해준 숙소는 번화가에서 한 블록 뒤켠에 자리한 곳에 있었다.

넓은 공간에 허름한 파티션으로 구역을 나누어 놓은 알베르게는, 부엌도 없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5유로라는 싼값에, 그리고 이제 와서 다른 숙소를 찾기도 어려웠고, 아저씨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그냥 짐을 풀기로 했다.

호스피탈레로가 자리에 없으니 조금만 기다리라며, 아저씨는 다시 한번 '무니시팔은 없다'라고 당부하시고는 갈길을 가셨다.

잠시 호객꾼으로 의심해서 죄송.

넓은 공간에 2층 침대가 꽤 많았다.

대략 12명 정도의 사람들이 침대 하나씩을 차지하고 2층엔 짐을 풀고 1층에 침낭을 깔아놓고 있었다.

어제 테오에서는 겨우 3명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에 비하면 꽤 많은 숫자이다.

이 중에 포르투갈로 향하는 사람도 있을까?

구석자리의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남들처럼 2층에 짐을 늘어놓고 1층에 침낭을 깔았다.

모두들 1층에 누워 있어서, 또 언제부턴가 2층보다는 1층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층 침대가 더 이상 새롭지 않다거나 높은 곳에서 자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는 점에서

까미노가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는 느낌도 들었다.


음식을 해 먹을 수가 없어 식당을 찾아 거리로 나섰다.

어두운 거리.

까다스 데 레이스는 모든 것이 다 조금은 낡았다는 인상을 준다.

오래되었다기보다는 낡았다.

어정쩡하게 현대화가 되려다 만듯한, 쇠락해가는 변두리 도시 같았다.

오늘은 '페스티보'라나 뭐라나, 하여튼 휴일이라 대부분의 상점이며 식당이 문을 닫았다.

모처럼 '오늘의 메뉴'를 먹으려고 했는데 쉽지 않다.

문을 연 식당을 찾아 어슬렁거리다가 아까 그 '신문지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손에 신문을 말아 쥐고 어딘가로 바쁘게 가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붙들고 식당을 물으니 '이번에도 너야..?'라는 듯

귀찮아하면서도 역시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그리고는 어느 식당으로 데려가더니 식당 주인과 메뉴에 대해 얘기하면서 흥정까지 해주었다.


"투 플라토.. 에잇 유로"


오늘의 메뉴가 있는데 전체와 메인 요리 이렇게 두 접시에 8유로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라시아스-"


그다지 할 일도 없으면서 마을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무언가를 물어보면 시간을 들여 손수 안내를 하고 흥정까지 해주니..

아저씨는 이 마을의 반장이라로 되는 건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서 해결해주는 홍반장.

덕분에 저녁도 잘 해결할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한편에 놓여있는 매트리스에서 한 여자가 속옷 차림으로 스포츠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칸막이가 없이 사방이 터진 곳이었는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샤워를 하고 판초를 침대 2층에 걸고 늘어뜨려 커튼을 만들었다.

산만했던 게 조금 아늑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