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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투 Dec 01. 2016

리스보아에서의 생일

파티마 - 리스보아

   


이곳은 퇴실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관리자도 안쪽에 있는 별도의 건물에 있었으며 편히 쉬고 알아서 정리하고 나가라고 했었다.

허리가 뻐근해 더 이상 누워있지 못할 상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씻고 짐을 챙겨 배낭에 넣는데 하나가 걸린다.

뤼노의 권유로 뿌엔따 라 레이나에서 마지못해 구입했던 7.5유로짜리 비니루몸빼.

갈리시아 지역 이후로 줄곧 비를 몰고 다녔지만 어제부터 날씨가 쾌청해서 이제는 정말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고 기온도 낮지 않아 방수 바지는 더 이상 필요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게 기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버린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애매하다.

기부인 듯 기부 아닌 기부 같은.

잘 개어서 옷장 아래 서랍에 넣어두었다.

입지도 않을걸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더니 까미노가 끝난 마당에서야 버리듯 기부를 했다.

누군가 파티마를 지나 싼티아고로 향하는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면 좋겠다.

단, 방수는 확실하지만 모양새가 좋지 않다.

아니 레온에서 고온 건조하여버려서 방수 기능도 불확실했다. 

어쨌든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며..


창문을 열어보니 아침노을을 배경으로 새떼가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성당의 첨탑도 아침 햇빛에 물들었다.

머물렀던 숙소


1층이 사무실이고 2층에 침실과 화장실이 있다.

 

아침으로 먹을 것을 사려고 동네를 둘러보았다.

어제는 밤이라 미처 몰랐었는데 평범한 동네라기보다는 관광지 느낌이 짙었다.

곳곳에 기념품 가게가 늘어서 있다. 

간단하게 빵으로 아침을 먹고 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늦었기에 다음 미사를 구경하려고 기다리며 광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릎으로 걸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도 보였다.

관광객들도 있지만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많다.

성모상이 있는 야외 성당에서도 미사가 열렸다.

예전에 누군가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싼티아고는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고, 이곳 파티마는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곳이다.

한쪽은 무덤이고 한쪽은 죽은 자가 나타난 곳이라니.. 둘 다 성지이면서 달랐다.


미사가 끝난 후 들어가 본 성당


대성당에서 미사가 끝나면 마리아상이 있는 야외 성당에서 다른 미사가 열렸다.

마리아상 주위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 가까이서 보기는 힘들었다.

미리 알았다면 한적했던 어젯밤에 혼자서 감상해 볼 걸 그랬다.


야외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자 잠시 후 종소리가 넓은 광장 가득 우렁차게 울렸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대성당의 종탑에 걸린 종들이 흔들렸다.  

우리나라의 종소리에 비해 조금 높은 톤이라 시끄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어쨌든 넓은 광장에서 듣는, 조금 요란하지만 까미노를 마치는 종소리로 들었다.


사람들이 파티마 대성당의 맞은편 건물로 가길래 따라갔더니 그곳도 교회다.



얼떨결에 이곳에서 열린 미사에 참여했는데 기도를 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합창이 아닌 여자 혼자 부르는 노랫소리만 기억에 남아있다.

노래가 숭고하면서도 편안하고 신비하기까지 했다. 

맑고 고운.. 천상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곳과 잘 어울릴 듯한 소리였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올려다본 예수상에 마치 눈물처럼 초승달이 달려있었다.. 는 느낌의 앵글로 사진을

찍었다.


미사에도 참석했겠다.. 일요일의 파티마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파티마를 빠져나왔다. 

이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보아로 간다.

리스본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리스보아라고들 불렀다.

리스보아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누군가는 저 풍경 속 어딘가를 걸어 싼티아고로 향하고 있겠지.

조금씩 버스 타기도 익숙해진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면서 '저 길을 왜 걸었을까? 이렇게 편한걸..'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막상 걸을 당시에는 버스를 보면서 '왜 버스를 타고 다니지? 걷는 게 더 좋은데.. 돈도 안 들고..'했었다.

 

리스보아엔 정오가 되기 전에 도착했다.

리스보아 터미널은 비로소 '도시'터미널의 분위기를 풍긴다.

버스에서 내린 뒤 잠시 분위기를 파악해본다.

분주하게 버스들이 들고 난다.

혼잡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많았다.

터미널 안을 살펴보니 마드리드행 '국제'버스 창구도 보였다.

버스 시각과 요금을 알아보는데 밤차가 있네. 요금은 38유로.

밤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새벽 도착.

그렇다면 38유로가 숙박 포함된 요금이라는 생각에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어두워서 국경 넘기는 볼 수 없겠지만(이미 그건 발렌샤넘어올때 해봤으니 됐고) 하루치 숙박비를 아낄 수 있고 어차피 장거리 이동이라 잠을 잘 것이란 생각에 결정하는데 큰 고민하지 않았다.

38유로.. 뭐 국경도 넘고 하루 재워주는데 그 정도야 지불할 수 있지.

리스보아에서는 2박 3일간 머물기로 했다.

오늘 하루, 내일 하루, 그리고 하루 더 둘러보고 모레 밤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로.

그래서 20일 밤 버스 티켓을 예매했다. 


지하철역은 바로 근처에 있다.

티켓도 가지가지.

일반 티켓과 정액권, 그리고 일일권 등등.  

오늘은 벌써 반나절이나 지났으니 중심부인 바이사사이두까지의 일반권을 선택했다.

'바이사사이두..' 이름에서 독특한 느낌이 묻어난다.

스페인 냄새도 풍기고 아랍 냄새도 풍긴다. 

내가 묵을 '리빙 라운지 호스텔'은 바로 바이사사이두역사곁에 있었다.

큰길에서 한 블록 뒤 켠 골목에 역사 입구가 있고 바로 가까이에 호스텔이 있다.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렸다.

안내데스크는 3층에. 3층부터 호스텔인 것 같았다.

과연 까페의 정보대로 깨끗하고 친절했고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빈 침대가 남아 있었다.

여행에도 비수기가 있는 줄 잘 몰랐는데, 비수기에는 이런 게 좋다.

번거롭게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 

주방시설도 훌륭하고 화장실과 샤워실도 깨끗했다.

주방을 둘러보는데 반가운 냄새가 풍긴다.

'아.. 이건.. 신라면?!'

그냥 라면이 아니라 신라면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한쪽 테이블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 두 여성, 한국사람이구나.

침이 꼴깍 넘어간다.

정말 라면 하나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초면에 라면을 구걸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라라쏘냐에서 신라면 수프를 먹었으니, 

어언 라면을 못 먹은 지 40여 일, 냄새라도 실컷 맡았다.

호스텔의 건물 외관은 좀 오래되어 보였는데 내부 시설은 은근히 첨단스럽다.

우선 하루치를 계산했다. 4인실 도미토리가 십팔 유로.

보증금으로 5유로인가를 맡기면 키를 준다. 침대 밑에 개인 사물함도 있다.

방도 잡았겠다 짐을 정리해놓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하니 몇 군데를 알려준다.

방금 전의 라면 냄새가 식욕을 더 불러일으켜 놓았다. 


일요일 한낮의 리스보아 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수기라는 이때가 이 정도이면 성수기에는 그야말로 미어터지겠다.

거리 구경, 사람 구경을 하며 식당을 찾는다.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조금 오래된 식당인데 가격도 저렴하단다.

외부는 공사 중이었지만 정상영업 중이었고 사람들로 붐볐는데 다행히 빈 테이블이 있다.

주문을 했는데 이것저것 여러 가지가 나온다.

8유로짜리가.. 많이도 나오네.

꼭 8천 원짜리 맛깔난 한정식 밥상을 받은 기분.

바구니에 담겨 나온 갈색 빵부터 한입. 치즈도 종류별로 조금씩 나왔다. 곰팡이 핀 것 같은 치즈까지.

잼도 여러 가지에다가 버터까지.

빵에다가 이 잼 저 잼, 이 치즈 저 치즈 조금씩 발라가며 맛을 보았다.

포도주는 비쌀까 봐 못 시키고 우나 쎄르베사, 맥주 한잔으로 구색을 맞췄다.

외국인들이 북적대는 식당을 찾아 들어와 음식을 주문하고 잘 먹는 걸 보니 배가 고프기는 했나 보다.

조금 짭짤했지만 잘 먹었다.

잘 먹고 계산을 하는데.. 순간 내가 잘못 봤나 싶어 계산서를 다시 확인했는데 18유로!

이런~  십팔.. 유로라니!? 어떻게 된 거야.. 했더니 내가 조금씩 뜯어 맛본 잼이며 치즈, 빵값까지 모두 따로따로 계산을 한 것이다.

어쩐지 서빙하시는 어르신이 이것저것 맛보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었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남은 음식이라도 모두 싸가지고 나오는 건데.. 차마 그러지 못하고 익숙한 듯 계산을 하며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

그나마 맛이 괜찮은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맛이라도 없었으면 정말 억울했을 텐데..


식당이 있던 번화가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니 한산했다.

관광지가 아닌 주거지가 일상을 떠오르게 만든다. 



골목을 걷는 게 참 좋다.







건물 전체를 타일로 도배를 해놓았다. 



리스보아는 거대한 강에 인접해 있다. 바다 같은 강.

도시의 앞으로 바다처럼 넓은 강이 펼쳐져있고 그 넓은 강을 가로지르는 아주 긴 다리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혹시나 대서양으로 떨어지는 해를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는데 육지가 가로막았다.

오늘은 날씨는 도와주는데 지형이 도와주지 않아 실패.

그래도 노을이 예뻤다.  



내일 로까곶에서의 일몰을 기대하며 발길을 돌렸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지만, 어려운 경제를 대변하듯 최소한의 장식과 조명이 씁쓸하게 밤의 리스보아를 비추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리스보아 시내를 걷노라면, 웬 아저씨들이 다가와 그 옛날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학생, 일루 와바. 좋은 거 있어' 하듯이 '헤시시 헤시시' 하면서 은밀하게 배시시 다가왔다.

별게 다 유럽임을 실감시킨다.



저녁은 호스텔에서 해 먹었다.

아껴왔던 아이템, 라떼스에서 H로부터 받았던 우리 쌀과 미역국 블록이다.

19일인 내일이 생일이었지만 한국시각으로 따지면 지금이 19일 새벽이 된다.. 는 핑계로 그리웠던 음식을 먹어치우기로 했다. 아까 낮에 라면 냄새 때문 에라도 먹어야겠다.

쌀을 씻어 앉히고 물을 끓이고 미역국 블록을 넣자, 비록 즉석식품이지만 내 코에 익숙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음~  스멜..'

내 생일에 내가 미역국을 끓여먹다니.. 엄마 생각이 났다.

매년 손수 미역국을 끓여 당신 생일상을 차리시는 엄마..

자기 생일 미역국을 손수 끓인다는 게 어째 조금 처량했지만 그래도 먹을 생각에 처량함은 금세 뒷전으로  밀려난다.



호스텔 거실에 있는 포르토 와인도 한잔 곁들여 차린  생일상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친구가 있어도 생일을 알리는 성격이 아닌지라 혼자서 조용히 저녁을 먹었다.

이상하게 평소에 느끼하게 여겼던 스테이크나 볶음밥을 먹을 때도 생각나지 않던 김치가, 담백한 미역국을 먹는데 그리워졌다.

욕심이 끝이 없다.

미역국 먹으니 김치 타령이다.

달달한 포르토 와인과의 조합도 영 아니다.

밥도 찰진 게 잘 안 넘어간다. 그나마 MSG 가득한 미역국 덕에 한 그릇을 비우고 남은 밥은 누룽지로 만들었다.

미역국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요거트를 꺼내 후식으로 먹었다.

네덜란드 자전거 여행 부부 바바라와 요르헨이 먹던 요거트가 먹음직해 보여 종종 사 먹었는데, 이곳 유럽에서는 우리나라의 떠먹는 요거트 3개 분량을 한 개로 팔고 또 한 번에 다 먹었다.

조촐...했다기보다는 조금은 초라하고 처량한, 쓸쓸한 생일이었다.


그렇게 요거트를 떠먹고 있는데 아까의 신라면 여성이 주방으로 오더니 팬에 뭘 볶는다.

'버섯이다!'

버섯을 채소와 함께 볶아 먹는다.

'버섯, 조심해야 하는데..'

배낭여행을 왔다는 그녀는 점심에 친구를 호스텔에 데려와 같이 라면을 끓여 먹었단다.

내일 리스보아를 떠난다며 몇 가지 여행정보를 알려주었다.

신트라에 가보라는 것.

거길 가면 페냐 성과 무어 성을 볼 수 있단다. 음 그건 나도 아는 바이다.

12유로짜리 일일 권을 끊으면 신트라에 갔다가 로까곶까지 버스도 이용할 수 있으며, 트램과 근처에 있는 에펠과 관련된 전망 엘리베이터도 탑승할 수 있단다.

트램이나 버스 몇 번만 타도 12유로가 훌쩍 넘어가는데 기차와 트램, 그리고 전망 엘리베이터까지(전망 엘리베이터만 타도 5유로)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일일 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잊어먹을 것 같아 사진 한방.

나도 아는 척을 해본다.

그녀가 벨렘 쪽을 안 가보았다길래 그곳의 수도원과 에그타르트가 환상적이니 가보라고 했다.(지는 가보지도  못했으면서) 


자랑삼아 까미노를 걷고 왔다고 말했는데 그녀는 까미노에 대해 몰랐다.

'여행사 후배도 그러더니.. 의외로 까미노를 모르는 사람이 많네..'

그럼에도 한국사람이 그 길 위에 그렇게나 많으니 더 알려진다면.. 나의 경우엔 적당한 숫자의 한국인을 만난 게 참 좋았다.

너무 많아도, 너무 없어도.. 번거롭거나, 외로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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