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O26

제11-2장 엄마 : 그 탐사선은 아마 엉엉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by 올드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 가 엄마를 마주 보았다.


가족이 있는 소중한 보금자리에 함부로 들어온 부랑자를 보듯, 엄마의 푹 꺼진 눈은

나의 움직임을 줄곧 좇고 있었다.


“엄마,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올까? 맛난 것도 먹고. 테레비도 같이 보고. 그럴까?”

말 수가 적은 상관과 어쩌다 같은 공간에 섞여 버렸을 때처럼, 머릿속에 대화거리들을 열거해놓고,

그중 가장 적절한 것을 골라냈다.


“덕분에 KBS 잘 보고 있습니다.” 엄마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거 KBS 아니야. 옛날 드라마들 모아서 보여주는 채널이야.”


“KBS3입니다” 엄마는 처음으로 표정에 변화를 보이며 딱 잘라 말했다.


엄마의 의식은 지금 이 우주의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 걸까.

보이저 2호를 아득히 앞질러 이미 관측 불가능한 우주로 가버린 건 아닐까.


그때 데스크 쪽에서 간호사가 일력을 찢고 있었다.

하루 동안에는 얼마만큼 지구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일까.


“추석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엄마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한참 남았습니다. 아주 한참” 나는 엄마와 같은 지점에서 대답했다.

그녀의 아들이 아닌 위치에서, 존댓말로.


“추석에 아들이 온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듯 엄마는 말했다.


“아드님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제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잘난 아들입니다.” 엄마는 푹 꺼진 눈 안쪽에서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엄마는 관측 가능한 우주로 잠시 되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약간의 공방전을 벌였는지.


“엄마”




휠체어를 밀고 요양원 앞 뜰을 천천히 돌았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엄마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내가 말했다.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애랑 오래전에 헤어졌어. 소영이 알지?

엄마는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그날 이후로 나, 좀 막살고 있어.

담배도 많이 피우고, 길바닥에 꽁초를 막 버려.

내 삶이 공평하지 않은데, 그 길바닥이라고 늘 좋은 날만 보내야 할 이유가 있겠어?

재밌지?


엄마는 그 대목에서 미간에 주름을 잡았는지 머리 근육이 조금 앞으로 당겨 내려간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왔는데, 아무래도 거기서 귀신을 본 것 같아.

생각보다 조그맣고, 하얀 모자 쓰고. 스머프 알지? 그거랑 좀 비슷하게 생겼어.

마음먹고 발로 차버리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어.

그런데 그때 엄마가 전화했잖아.

엄마가 무서웠는지 도망가더라.


“KBS3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무슨 말이야…”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는, 국 위에 잠깐 떠올랐다 사라지는 부유물 같은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월의 정오. 햇살은 생각보다 건실했고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따듯했다.


“또 올게 엄마.”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넘겼다.


여기서 헤어지고 나면 다음 만남은 어떤 형태가 될까.

엄마의 정수리에 대고 또 이런저런, 잘되는 거 하나 없는 내 이야기들을 일러바칠 수 있을까.


더 머물기도 떠나기도 힘든 나는 한 동안 머뭇거렸다.


간호사의 손에 쥐어진 엄마의 휠체어는,

전력이 다 떨어지고 지구와의 교신도 끊긴 뒤 성간 우주를 떠도는 보이저 2호처럼 보였다.


그 아득한 곳에서 그 탐사선은 아마 엉엉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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