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장 엄마 : 많이 쓴 스카치테이프처럼.
서해고속도로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거쳐 남해고속도로를 차례로 달렸다.
오월의 한국은 무심하게 아름다웠다.
‘너희는 이맘때쯤 각자의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아름다울 거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운전 조작은 팔과 다리에 맡겨 둔 채, 나는 온통 과거에 대한 회한과 미래에 대한 걱정에 잠겨 있었다.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 그러나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걱정들에 들씌워져
수십 킬로미터를 달렸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경부고속도로 위를 달려야 하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조언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달리세요. 앞에서 다가오는 산과 들에 마음을 나눠 주고.
처음 와 본 외국의 풍경을 대하듯.
그러지 못하면 다섯 시간 운전의 끝자락에서, 자신이 조금 더 비관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차에서 내리자 정겨운 태평양 바다 냄새가 났다.
”오늘 방문하기로 예약은 하셨어요” 접수처 간호사가 의례적인 말투로 물었다.
“아뇨,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일어나자마자 시동을 걸어 버렸거든요.”
이시카와라는 남자가 전한 불길한 소식 때문이었으니, 사실을 말한 셈이었다.
“면회를 오실 때는 적어도 하루 전에 연락을 주셔야 해요. 우리도 사정이 있고,
가족을 만나는 날에는 환자분 목욕도 미리 시켜 드려야 하니까요”
못마땅한 기색이 잠깐 스쳤지만, 본 얼굴은 친절한 쪽에 가까웠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만 했네요. 잘 몰랐어요.”
내 이름과 엄마 이름을 말하자, 간호사는 나를 흘깃 보며 말했다.
“할머니 지금 재활 프로그램 중이세요. 이십 분 뒤에 면회 가능해요”
“좀 어떠세요, 어머니 상태는”
“밥 잘 드시고, 배변 잘하시고 건강하신 편인데…” 입술을 앙다물며 간호사는 말을 멈췄다..
적잖이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체적으로 특별한 문제는 없고, 이쪽이 좀 안 좋다는 말씀이시죠?”
나는 관자놀이 부분을 둘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도 꽤” 간호사는 머리를 사선으로 조금 떨구며 대답했다.
나는 그 동작이 이상하게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면회 대기실로 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십 분을 기다렸다.
창밖으로 황령산 비탈길에 성기게 솟은 소나무들이 보였다.
침엽수들은 전경을 다 가리지 못해, 그 너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길눈 어두운 사람 앞에 갑자기 익숙한 길이 나타나듯, 주변이 다시 또렷해졌다.
그녀의 집이 블록 두세 개를 더 지난 곳에 있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랐다.
“할머니, 서울에서 아드님 오셨어요” 간호사가 휠체어를 밀고 오면서 말했다.
엄마는 피부를 몇 겹 벗겨 냈는지, 조금 작아져 있었다.
많이 써버린 스카치테이프처럼.
“엄마” 나는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이제 테레비는 잘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엄마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엄마 나야, 한이”
간호사는 그쯤에서 빠지려는 듯 슬그머니 돌아섰다.
엄마는 간호사를 따라가고 싶은지 몸을 비틀었다.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았다.
“잘 지냈어?”
엄마는 간호사가 걸어간 방향에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얹힌 내 손을 조용히 걷어 냈다.
예의 바르게.
멀리 광안리 바다 너울 위에서 햇살이 자잘하게 깨지며 울고 있었다.
어느 호실에선가 노인이 악을 쓰며 누군가를 나무랐고
그 안의 누군가는 “왜 그래요 왜”하고 말하며 문을 ‘탁’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