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장 나 : 그 ‘파장’은 아마 클 겁니다.
퇴근 시간 삼십 분을 앞둔 금요일 오후였다.
직원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상기된 얼굴을 하고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 5일 근무를 넘어, 이제는 바야흐로 주 4.9일쯤에 접어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기다리는 가족에게, 조금 있다 뭉칠 친구들에게, 혹은 드러누워 넷플릭스를 볼 침대를 향해
사람들은 이미 반쯤 떠나 있었다.
“그러지 말고, 백 미터 달리기 스타트 자세나 잡고 있는 건 어떨까요? 그게 0.1초라도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데 도움을 줄 것 같은데…”
이렇게 농담을 던져도 요즘 세대는 그 안에 담긴 냉소나 의도를 굳이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나에게도 한 때는 나 하나만을 기다리던 엄마가 있었다.
지금 그녀가 기다리는 건 ‘불멸의 이순신’ 재방송이다.
아주 서서히 포악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요양원 도우미로부터 듣고 있는 터다.
효자와 불효자를 따지기 이전에, 금요일 퇴근시간의 나를 들뜨게 하게 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엄마가 끓여 주는 ‘돼지고기가 골병이 들도록 끓여진 김치찌개’를 다시 먹을 수 있다면,
아니, 아들 도착 세 시간 전부터 김치찌개 장만을 시작하는 멀쩡한 엄마를 다시 대할 수 있다면
이 시각의 나도 한껏 들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내게도 친구들은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들은 논리가 강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논리가 강한 것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다른 논리를 꺼내는 친구에게 적개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말을 하다 삿대질을 시작한 친구도 있다. ‘친구한테 삿대질은 좀 아니지 않냐’고 말하면 슬그머니
손가락 몇 개를 더 펴면서 자기는 삿대질 한 적 없다고 잡아뗀다.
젊었던 날, 논리가 부딪히면 몸을 움직여 운동을 같이하고 맛집을 찾아다녔는데, 요즘은 죽치고 앉아서
이야기만 하니 즐거움보다 부담이 앞선다.
소주병이 가운데 놓이지 않는 한, 십분 이상의 대화를 힘들어하는 친구들도 태반이다.
일찍 드러누워 영화를 보는 건 또 내 성향과는 맞지 않는다.
시간을 의미 있고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내 평소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보기’ 만을 뺀 온갖 하찮은 짓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하곤 한다.
그때 안내 데스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이시카와라는 사람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데스크 여직원의 목소리에는 뜻하지 않게 죄를 짓은 자의 고뇌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이라크 파병 중인 아들의 비보를 전하는 전령처럼.
이시카와는 로비 한쪽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커피를 내린다기보다는 머신에게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에 가까웠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성큼 다가온 미래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인류는 기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다.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로비의 그쪽만 어두컴컴하게 일렁였다.
“오랜만이군요, 이시카와 씨” 그의 뒤에서 내가 인사를 건넸다.
“여허, 김 팀장님.” 그가 돌아보며 반갑다는 표정을 꺼냈다.
“좋은 회사 다니십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데스크의 여직원은 그 방문객과 내가 이미 아는 사이라는 걸 눈치채고는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자기의 역할이 방문객을 평가하여 ‘입구 컷’을 하는 것이 아닌데도.
로비의 의자 앉자마자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들은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겁니까?
“좋습니다.” 이시카와가 입을 뗐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마음을 정한 뒤 몸을 풀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아나콘다처럼.
“그날, 택시 안에서 그리고 호텔에서 요모조모 영한 씨를 살펴봤습니다.
당시에는 혼란에 빠져 있는 가련한 인간이라는 인상이 지배적이었죠.
그런데 혼란이 사라진 뒤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더군요.”
“글 솜씨를 뽐내고 싶었을 뿐입니다.”라고 나는 가볍게 말했다.
지리멸렬한 나에게도 잘하는 것 하나 정도는 있다 뭐 그런.”
이번에도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할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을 말했다.
“제가 받은 지시는 딱 이겁니다. 개인적으로는 궁금한 것이 많지만.
그 침대 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아내라는 것.”
그는 주위를 힐끗 둘러봤다.
특히 안내 데스크 쪽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고 운을 띄우고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어 내가 말헀다.
“제가 워낙 건강 체질이라…”
이시카와는 아무 말 없이 쓰고 있던 빵모자를 벗더니 손 안에서 이리저리 돌리며 각을 잡았다.
좋은 말로는 안 되겠다는 계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동작이었다..
“그 일로 저 쪽의 신성이 조금 피해를 입은 모양입니다.
그 ‘파장’은 아마 클 겁니다.
영한 씨의 주변에도 틀림없이 번질 겁니다.”
이 자리에 있지 않은 아련한 누군가와의 추억을 떠 올리듯 이시카와가 말했다.
“어쩌면 일찌감치 저쪽의 손이 이미 뻗쳤을 수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