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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인 Jan 27. 2022

늙어 버린 마스코트 02

아빠의 기억

80년대 초에는 중동붐이 있었다.

집집마다 눈가가 촉촉한 가장들이

‘여보 애들 잘 부탁해 내 걱정 말고’

결연한 한마디를 남기고

시리아로 사우디로 월급은 많고 일은 고된 열사의 나라들로 떠났다.  

    

석유가 물처럼 쏟아지는 사막이 있고 당연히 물이 너무 귀하다 보니

비싼 석유를 물처럼 퍼주고 이나라 저나라에 파이프를 대고 물은 사 먹는다고 했다.

안 믿겼지만 그때는 다들 중동 이야기에 침이 말랐다.

 

드넓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파이프를 심는 공사를 대수로 공사라고 부르는데

그 당시에는 뉴스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니 사우디 대수로 공사니 그 말이

88 올림픽만큼이나 자주 울려 퍼졌다.

     

어린 나는 대수로라는 말을 하도 자주 들어서 현대나 삼성처럼 무슨 건설회사 이름인 줄 알았다.

석유를 물처럼 퍼준데도 사막기후 지역의 나라들이 물 부족하기는 다 거기서 거기라

나중에는 아예 지천에 널린 바닷물을 맹물로 바꾸는 담수화 공장은 만든다나.

참 돈이 흔하니까 돈으로 할 수 있는 물 만드는 기술을 다 써 볼 참인 것이었다.      


그 모든 공사들에 우리나라 기술과 인력이 들어갔다.

그것도 엄청 들어갔다.


동네마다 사우디 리비아로 떠난 가장들이 즐비했고

남겨진 가족들이 어쨋다더라 소문도 즐비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 행렬 중 하나였다.

내가 열 살.

큰 오빠가 거의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으니까

갓난쟁이 업은 젊은 마누라가 울먹이며 따라나서는

어린 가장은 이미 아니였지만

고만고만한 삼 남매를 엄마한테 맡기고 애들 대학공부라는

중년 가장 최후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라.     


아... 차라리 60년대였고. 차라리 70년대였고

우리 집이 차라리 저어기 어디 시골이었으면

큰 오빠 하나는 대학 보내고

작은 오빠는 공장으로

나는 애보기든 파출부든

서울로 일찌감치 들 떠나가고

부모님들의 부담도 좀

덜 했으련만.     


경제적 풍요와 함께 개인에 대한 기대치도 한껏 고양되던 시대였다

나도 작은 오빠도 거창한 과외씩이나 받아가며 안 되는 공부를 기어이 했다.

작은 오빠는 무려 미술까지 했다.

돈 들어갈 짓은 골라 가며 했다.      


결과는 아빠의 중노동과 중동행.    

 


아빠는 이미 나이가 있으셨으니까 건설현장 파견직은 아니었고

거기서 건축자재 납품업을 하는 미국 기업의 현지 지사장 역할이었다.      

근무 기한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지사가 문을 닫지 않는 한 아빠의 근무 기한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장사가 잘되면 계속 거기 사시는 거였다.

1-2년에 한 번 아주 잠깐 휴가를 나오셨지만

이제 아빠는 사우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1980년에 사우디로 떠난  아빠는

2017년 영구 귀국을 하실 때까지

장장 37년을 사우디에 계셨다.



처음 나가실 때 우리나라에 국제공항은 김포공항이 유일했다.

아빠가 처음 떠나시던 날 김포공항 환송장에서 치솟는 비행기를 향해

손을 죽자꾸나 흔들었던 기억이 난다.

버스 떠날 때 손 흔들면 보이기라도 하겠지만 덩그러니 멀어지는 비행기 동체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 그쪽 편에서 보이기나 했을까.


그래도 이제 가면 죽고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울며불며 그렇게 아빠를 보냈었다.

그 아빠가 37년 후에 으리으리한 인천 인터내셔널 에어포트로 귀국을 하셨다.    

  

그리고 1년 남짓 우리 곁에 계시다가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누구 말마따나 술 재미도 여자 재미도 없는 고루해 빠진 회교국에서의 37년.

어릴 때는 술이나 여자 어쩌고 운운하는 그런 소리들이 참 듣기 싫었었다.


아빠를 두고 그런 종류의 생각을 연결하는 것도 듣기 싫었고

마치 그렇게라도 재미를 찾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듯한

아줌마들의 실없는 입방아도 듣기 싫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아.... 아빠의 삶이 차라리 좀 더 재미난 동네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썸씽이라도 있게 살으셨더라면.

그래서 엄마랑 죽네사네 갈등하며 사람 사는 것처럼 큰소리 내며 살다 가셨더라면.

귀국하면 방문도 좀 뻥뻥 차고 밥상도 좀 때려 부수고. 싸우는 엄마 아빠 뜯어말리며

울고불고 오빠들이랑 부둥켜안고 울어본 기억이 있다면.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이제야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아빠의 삶이 차라리 그랬다면 그렇게 고행하는 수도사 같았던 아빠가 뒤늦게 안쓰럽진 않았을 텐데.  

한 사람의 인간으로 한 사람의 친구로 아빠는 너무 쓸쓸한 삶을 살다 가신 것 같다.

아빠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삶에 던져진 과업들을 마치기 위해 살다 가신 것 같고 그 과업이 대충 마무리될 때 아빠는 스스로 ON/OFF 스위츠를 끄듯 그렇게 어느 아침에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그래서 아빠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빠가 긴 사우디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는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있었다.


손바닥 안에서 고물거리던 자식들도 이미 다들 징그럽게 커져서

눈길이 마주치는 것도 어색해지고.

살갑던 마누라도 이게 내가 그렇게 따라다니고 좋아했던 여자가 맞나?

낯선 중년 여인이 부인인 듯 아닌 듯 마냥 이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분은 유치원 친구들이 싸우듯이 유치하게 매일 싸우셨다.

아빠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엄마는 아빠를 미워했고.

혼자 호젓하게 살다 날벼락처럼 들어온 새삼스런 남편이란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

고생한 사람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는 안팎의 질책들이 오히려 독이 되었으리라.

37년이나 떨어져 살던 부부는 다시 한 공간에 살면 안 된다.

인생은 동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37년 세월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아빠가 직원으로 데리고 있던 젊은 청년이 아빠 귀국 무렵에는 이미 할아버지가 되었더라고 했다.

처음 아빠가 사우디에서 건축 자재점을 오픈했을 때

일당 노동자로 왔다가 일솜씨가 야무진 게 아빠 눈에 쏙 들어서 월급 직원으로 눌러앉았던

‘싸딕’이라는 파키스탄 청년의 이야기다.


우리한테 무슨 경사가 있을 때마다 금반지 같은 좋은 선물도 아빠 편에 보내고

나도 아저씨 자녀 손주들 선물도 챙기는 서로 잘 아는 삼촌 같은 사이가 되었었다.


스무 살 남짓을 젊었던 그 싸딕 아저씨가 근 37년 시간을 아빠 옆에서 꼬박 같이 늙어가서

아빠가 귀국하실 무렵에는 파키스탄 본국에 드넓은 땅도 사고 아이들이 시집 장가가서 손자까지 보고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아빠는 당신 가족사진 보듯이 싸딕 아저씨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며 뿌듯해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화로 싸딕 아저씨한테 전했을 때.

그 아저씨는 통곡을 했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그 통곡 소리는 우리 삼 남매 중 그 누구의 울음소리보다 깊고 아팠다.

그가 어쩌면 우리 아빠의 진짜 아들이 아니었을까.

아빠는 파키스탄 청년을 낳은 적은 없지만

37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빠의 생물학적 자식들은 여기 멀리서 즈그들끼리 나이를 먹었고

아빠와 싸딕은 거기서 같이 나이를 먹었다.

  

이 글을 쓰며 생각을 해보니

그 싸딕 아저씨 같은 사람이 있어서 아빠가 술 재미도 여자 재미도 없는 그 이국땅에서

서리서리 실타래 같은 긴긴 시간들을 외롭지 않게 보내셨으리라.

고맙지만 이제는 연락이 끊어져 다시 인사를 전할 방법이 없다.


그러지 말걸.

싸딕 아저씨랑 계속 연락을 할걸.     


아빠 생각이 나면

모든 게 아쉽다.             



늙어 버린 마스코트. 0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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