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이라고 휴대폰 알림 창이 뜬다.
1년 전 12월 3일부터 그 전후로 며칠간 찍었던 사진들이 음악과 함께 편집된 동영상처럼 파노라마로 재생된다. 내가 설정한 것도 아니고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여유 있는 시간에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 의외의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매일의 일상은 똑같고 계절에 따라 옷만 달라지는 것 같지만 지금 내 얼굴과 비교해도 N 년 전 내 모습은 젊게 느껴진다. 그래봐야 5년이 넘지 않은 과거인데 말이다. 출근 전 화장하면서 평소보다 보습크림을 좀 더 공들여 발라본다.
‘또 한 달이 지나면 착실하게 나이에서 +1 되겠지? 야박한 것.’
세월에 귀가 있다고 해도 그냥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해본다. 가끔 혼자 나를 웃겨주면 덜 늙으려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은 화장품으로 숨겨도 경직된 몸의 근육은 숨길 수가 없다. 지난주부터 잠들고일어날 때마다 쏙쏙 쑤시던 어깨와 등은 주말을 지나면서 불편보다 통증에 가까운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주름 진 얼굴은 마음만 아프게 하지만 몸의 통증은 게으른 엄살쟁이를 마사지샵까지 보낸다. 하지만 마사지샵 원장님의 조금만 눌러도 눈물 나게 아픈 곳을 신묘하게 찾아내던 모습이 떠오르며 통증 때문에 생겼던 용기가 다시 사그라든다.
‘……예약을 내일로 미룰까?’
고작 하루 차이가 뭐라고 유예한 24시간에 잠시 안도감이 든다. 쓴 약 먹기 싫은 아이 같은 모습은 어른이 되면 무표정에 숨긴 채 살 수 있다. 이럴 때 보면 어른이 된 것이 좋다.
내일이 된다고 마사지가 덜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당장 오늘 잠자리에 들 때는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예약시간을 하루 연기했다.
‘대신 오늘은 반신욕으로 근육을 좀 풀어주고 내일 가지 뭐.’
속 보이는 타협 끝에 일단 기분이 좋아진다. 연말이 되면 의례 주고받는 오래된 지인들의 ‘해 넘어가기 전에 얼굴들은 한번 보자.’는 카톡을 보니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실감 난다. 작년에도 이렇게 말해놓고 두 명은 못 봤는데 올해는 다 만나지려나? 하는 기대도 조금 된다. 이제 12월이 되어도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이 예전만큼 많이 들리지는 않는다지만 오랜 시간 12월을 채워 온 빨강, 초록, 흰색의 조합들은 여전히 12월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올해도 이렇게 그냥저냥 흘러가는구나……
퇴근 후 현관 거울에 보이는 내 모습은 이제 제법 매운바람에도 얇게 입고 외출한 탓에 루돌프 코가 되어 있었다. 이제 썰매 끌 수 없는 어깨 아픈 루돌프는 아이들과 저녁 잘 먹고 반신욕을 즐기고 잠자리에 들면 된다.
이제 막내도 중학생이니 내 손으로 떠먹이고 씻기고 토닥이며 재우지 않아도 되는 오늘이 새삼 감사하다. 덕분에 우리 집 취침 전 풍경은 따스운 가족 드라마보다는 군인들의 병영 같은 분위기이다. 이때부터는 허락된 휴대폰 허용시간이 지나면 먹통이 되는 휴대폰의 마지막 1초까지 알뜰하게 사용하려는 아이들과 정해진 시간이 되면 불을 다 꺼버리고 자라고 하는 나 사이에 하찮은 줄다리기가 생기기도 한다. 오늘처럼……
“엄마. 계엄이 뭐야?”
거실과 주방 불을 끄고 있는 나에게 방 침대에 누운 둘째의 질문이 내 귀를 잡아당긴다.
요즘 한국사 진도가 근현대사를 나가고 있는 것일까? 신나게 친구들과 대화하다 자야 할 시간에 임박해서 궁금증을 표현하다니…… 좀 더 있다 자려는 꼼수로 엄마가 ‘그만 놀고 얼른 자.’라고 하지 않을 주제를 꺼낸 것을 알면서도 속는 것이 엄마다. 하지만 질문에 너무 신나는 티는 내지 말자 싶었지만,
“전시, 사변처럼 나라의 큰 위기가 닥쳤을 때 대통령이 치안의 업무를 군대를 투입해서 하는 거야. 단어가 좀 낯설지? 그러니까, 전쟁이 나거나 많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많은 수의 사람이 죽거나 다칠 수 있잖아? 보통의 경우에 이런 치안을 경찰이 감당하지만, 폭동을 일으킨 사람의 수가 너무 많거나 행동이 너무 폭력적이면 그 사이에서 약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지? 일반적인 경찰들의 업무로 불가능한 상황이라 판단되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 대신 군인들이 질서 유지에 투입되는 거지. 학교에서 근현대사 진도 나가니?”
둘째의 기특한 질문에 한껏 신이 난 엄마 티가 너무 난다.
이쯤에서 아, 그렇구나 하고 자러 갈 시점인데 두 번째 질문이 또 들려온다.
“요즘에도 그런 게 있어? 계엄 말이야.”
각자 방으로 들어갔던 큰 아이와 막내도 방에서 얼굴들을 빼꼼 내밀면서 눈을 반짝인다. 초등 졸업과 함께 졸업한 베드타임 스토리의 귀환인가? 말똥 한 눈들을 보니 잠보다는 대답이 더 궁금한 모양이다.
귀엽고 기특하고, 괘씸한 녀석들…… 한껏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계엄령이라는 개념은 근대화 이후에만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요즘에만 있는 것이지.”
이해가 덜 된 눈빛들이다. 계엄은 요즘도 있다는 것만 알면 다들 자러 갈 줄 알았는데 내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나 보다.
이렇게 되면 길어질 텐데 괜찮으려나? 아이들의 얼굴에서 지루함의 징조를 살피며 말을 잇는다.
“근대화 이전에는 왕의 명령이 그 자체로 법이 되는 세상이었어. 절대왕정, 우리나는 조선시대같이 말이야. 지금은 최고 권력자라고 해도명령 하나에 집행이 실시간으로 되지 않잖아? 삼권분립 기억나지? 그런 면에서 보면 일인자의 말 한마디가 법이 되는 몇 안 남은 특수한 상태의 법이야. 그래서 발동 조건이 까다롭지? 전쟁이 나거나 전쟁에 맞먹는 사변이 일어나야 하는 거니까."
아이들은 각자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밤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뜬금없는 아이들의 호기심에 괜히 엄마가 신나는 밤이다.
호기심을 표현할 줄 아는 아이들의 질문 두 개로 둥실둥실 신이 난 부부의 TV시청 시간이 되어 과자 한 봉지를 들고 TV앞에 앉았다.
30분 전쯤 선포되었다는 계엄에 대한 뉴스가 모든 채널에서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