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택배 속 디올백

우리가 로고를 살 때, 그들은 무엇을 사는가?

by 오래된 도서관

모르는 게 약

보는 눈은 다 비슷하다. 친정 엄마 생신 선물로 적당해 보이는 가방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냉큼 살만큼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결국 동생과 함께 예산을 합쳐 큰 마음먹고 디올백을 사드렸다.

그리고 중년의 딸들이 쌈짓돈으로 사 드린 명품백은 다음 해 여름, 낚시 가방과 함께 들려 바다로 가는 날 재회했다. 교회와 군청 행사 같은 곳 가실 때 쓰시라며 생색내며 전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흰색 디올백은 김장 올려 보내는 택배상자 한편에 묻어 우리 집으로 왔다. 두터운 김장 비닐을 겹겹이 두른 채.

‘매년 먼지 털기 귀찮아 보낸다.’ 라며……

그렇게 엄마의 낚시 나들이길을 지키던 디올백은 이모네 집에서 가져온 찐과 짭 루이뷔통 옆을 차지하게 되었다. 딸들이 큰맘 먹고 사준 가방을 들고 낚시 가는 엄마와 비싼 로고 달린 가방에 귤 담아 외출하는 딸은 상당히 격이 맞지 않는가?

그 후 어느 것이 찐이고 짭인지 구별하는 못하는 까막눈 손에 들어온 명품 삼 형제는 주인 잘못 만나서 지금까지 고생이 많다. 가방이 주는 가치에 시선을 주던 지인들은 곧 소지품들과 함께 꺼낸 귤에 시선을 빼앗긴다. 진짜 루이비통에 터질지도 모를 귤을 넣을 리 없다는 합리적 의심과 쟤는 그러고도 남지 않나? 하는 주관적 평가 사이에서 고민중이리라.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듯 비싼 것은 비싼 값을 할 것이라는 추측은 나도 할 줄 안다. 하지만 오늘날의 명품은 장인이 한 땀 한 땀 지은 수공예품은 아니다. 그럼에도 거대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전 세계 백화점에 똑같이 갖다 놓는 가방이나 옷이 여전히 수백만 원대의 가격을 유지한다. 저만큼씩이나 지불할 매력이 있나? 문득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떠오른다.

사실 나의 사치품은 끝까지 읽지 못할 책을 사들이거나 끝내지 못할 공부를 시작하는 것 같은 비합리적 충동에 치우쳐 있을 뿐 사치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사치의 종목이 다른 것일 뿐.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처럼, 명품 보는 안목이 없으니 물욕도 생기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낭만적 가치의 붕괴와 '오브제'의 산업적 제조

멜빵바지 입은 이탈리아 장인의 손 끝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이미지를 보고 지갑을 열었는데, 실상 중국이나 베트남 혹은 인도의 노동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져 이탈리아 장인이 한번 쓰다듬고 백화점에 걸린 것을 산 것이다. 일단 여기서부터 크게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물론 이탈리아 장인의 손으로 만들었건 아시아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만들었건 좋은 가죽과 부자재를 사용하고 매끄러운 이음새와 마감처리를 한 물건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 따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로고 없이 백화점에 걸리면 지금의 가격을 호가할 수 있을까? 지금 붙은 가격표에는 제품의 가격에 장인의 오브제라는 명품의 희소한 특성에 큰 부가가치가 포함된 것이다. 이를 부인할 수 있을까?

또 다른 관점에서 중국 공장 노동자가 만든 시계가 장인이 나사 하나 조여 넣는 것으로 명품이 되는 시대를 사는, 장인의 생각은 어떨까?

결국 명품 산업은 희소성과 대량생산이라는 달디 단 열매를 모두 따먹고 있다. 만약 내가 명품 사업으로 이윤을 내는 사람이더라도 품질 향상보다는 고가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에 공을 들였을 것이다. 이미 로고 자체로 고품질인 제품의 품질을 어렵게 더 높이려는 노력보다는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희소성’에 더 큰 부가가치가 붙을 것 같으니 말이다.

그래서 명품은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들이 카메라 앞에 설 때 그들에게 입히고 들리는 것에 열을 올린다. 지금의 명품 시장의 볼륨은 이렇게 선망을 팔아 흡족하게 만들어졌다. 심지어 손으로 만져지고 실제 눈으로 보이는 부의 상징은 ‘희소성’에 기꺼이 지갑을 열게 하는 강력한 최면 효과로 작용한다.

가격을 초월한 '사회적 신호'의 작동과 간극

나처럼 명품의 소유하고 싶은 열망과 안목이 별로 없는 부류에게 명품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는 고민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의미가 없는 공상일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모르는 게 약이다.

그럼에도 명품이 많은 경우에 소유한 사람의 격을 높여주는 물건이라는 사실에도 확실히 동의한다.

체감되는 현실이 그렇다. 하지만 속 편한 명품 까막눈은 오늘도 얻어온 것 중 어느 것이 진품인지 모를 루이뷔통에 소지품을 대강 채우고 외출한다. 문득 그간은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중 명품을 좀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내 손에 든 물건의 가치에 대해 잘 모르는 내 태도가 무심하게 부를 은근히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물건을 사는 기준은 일단 가격이다. 그리고 기본형에 고유 기능이 훌륭한 것 중 소재가 좋은 것을 선택하는 습성이 있다. 이는 공교롭게도 과시를 경계하여 로고를 드러내지 않는 제품을 선호하는 ‘올드머니룩’의 선택 기준과 일치했고, 그 우연 덕에 로고 없는 나의 소품들의 실 가격은 숨겨졌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은가? 손에 들고 몸에 걸친 물건의 가격을 드러낼 만한 로고를 지양하는 선택 기준이 ‘올드머니’와 ‘노머니’의 공통점이라니. 멀리서 보는 인생은 이래서 희극이라고 하나보다.

하지만 더 이상 명품은 희소한 수량만 공급한다고 보기 힘들어졌다. 여기에 더해 전문가도 구별이 쉽지 않은 짭 명품 시장의 등장과 성장까지 더해져 명품은 그 고유 가치에 전방위에서 도전받고 있는 셈이다.

결국 수백만 원의 가격 차이는 명품의 히스토리나 희소한 가치가 아니라, 로고와 사회적 인증이라는 무형의 가치에 대한 비용이다.

클래식 명품의 사양길은 새로운 브랜드와의 세대교체로 시작될 줄 알았는데 외려 자신들의 외주 공장에서 명품의 가치가 깨지고 있는 셈이다. 외주 공장의 뒷문으로 흘러나오는 ‘짭의 난’은 그간 명품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해왔던 다른 요소의 효과와 겹쳐지고 있다.


명품을 죽인 진짜 명품

어릴 때 갑자기 세탁기가 고장이 나서 때 아닌 손빨래를 해야 했던 시기가 보름이나 있었다. 교복 입던 학생 시기의 세탁기의 사망은 우리 자매를 때 아닌 전근대 생활 체험으로 몰아넣었다. 그나마 여름옷이라 손으로 비틀어 짜기에 부담이 적은 게 다행이랄까? 지금같으면 바로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당장 다음 날부터 세탁기 사용을 하면 되었겠지만, 그땐 신용카드의 개념이 없을 때였다. 마침 모친께서는 곗돈 다 넣고 현금이 없다는 이유로 세탁기 영접을 보름 뒤로 미루셨고, 우린 보름 간의 손빨래를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세탁기 사자고 은행 대출받으러 갈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필수가전 없는 보름을 참게 한 그간의 소비 패턴은 작고 반짝이는 플라스틱 조각. 신용카드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신용카드의 축복은 명품시장에도 공평하게 뿌려졌다. 우리는 아직 받지 않은 앞으로 3개월간의 내 월급을 먼저 지불하고, 갖고 싶은 물건을 당장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아무나 갖기 힘들었던 명품은 낮은 곳까지 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명품의 낭만적 가치였던 '장인정신'과 '절대적 희소성'은 이미 오래전에 산업적 이윤 앞에 굴복하고 붕괴되었다. 결국 명품의 낭만적 가치를 파괴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명품 산업의 대중화를 도운 가장 강력한 조력자. 신용카드였다.

문득 오래된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 명품의 장인 정신과 희소성이라는 낭만은, 신용카드가 모두에게 그 '부유함의 가면'을 쓸 권리를 주면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신용카드는 '미래의 나'로부터 자금을 조달하여 '현재의 나'에게 즉각적인 사회적 지위를 선물하는 궁극의 사치품이었다. 명품의 낭만을 끝장내고, 누구나 '빈티 나지 않으려는 가면'을 쓸 수 있게 만든 것. 결국 명품을 죽인 것이 신용카드였다. 오늘날 진정한 '명품'은 내가 가진 신용을 대변하는 신용카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