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같은 어른들의 숲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뭉쳐 떠 다니는 것 같은
소음들 사이로 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뚜껑을 열며 하얀 김을 피워 올리던
만두가게 아저씨의 마법사 같은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흰 연기에서 나는
둥글하고 따뜻한 만두냄새에
바삐 걷는 엄마 손을 당겨 세웠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놓칠세라
손을 꼭 붙드는 엄마였지만,
엄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여섯 살 짜리는
따뜻한 김이 끼쳐오는 만두가게 앞을
감흥 없이 지나가려는 엄마와
소리 없이 손아귀 씨름을 했다.
하지만 단단하게 다시 벙어리장갑 낀 내 손을
고쳐 잡고 걸음을 떼려는 엄마와
만두의 온기를 따라가고 싶은 꼬맹이의
끝이 뻔한 실갱이는 금세 끝이 났다.
엄마 손에 매달려서라도 버텨보려던 참에
엄마 뒤로 보이는 키 큰 어른들의 움직임들 사이로
이상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빨간 닭발 같은 앙상한 손에 들린
반짝거리는 금속 쟁반이
겨울 낮의 빈약한 햇빛을 받아
반짝 눈을 찌르는 장면이었다.
어딘가로 종횡무진 걸음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 멈춰서 빛나는 은색 쟁반을 내밀며
“백 원만!”
하고 말하는 어눌한 말소리.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가난의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거지를
선생님, 사진관 아저씨, 약국 아줌마 같은
직업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 아저씨는 이 추운 날씨에도 장갑을 끼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하는 문화충격으로
백 원만 아저씨의 모습과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추위에 빨개진 손등에
벽돌이 쌓인 모양 같은 흰 각질이 눈에 들어왔다.
벙어리장갑을 낀 손 끝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보았다.
장갑 안에서 움직이는 손끝이 시려웠다.
‘추울 때 장갑을 끼지 않고 있으면 손에 벽돌 모양의 줄이 생기는구나.’
바쁜 엄마의 걸음에 꼬마의 짧은 다리는
종종걸음으로 뛰듯 따라가야 할 속도였다.
긴 말을 하기에는 숨이 차기도 했지만,
백 원만 아저씨를 보고 난 후 생각을 정리해서
목도리 안에 얼굴을 반쯤 숨긴 엄마를 올려다보며
비장한 결심을 말했다.
“엄마. 나 거지는 안 할래.”
꽤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다행히 여섯 살의 다짐을 잘 지키며 살고 있다.
그리고 무심히 지나오던
그 여러 번의 겨울이 반복되는 동안
여전히 차가운 밤거리에는
백 원만 아저씨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문득 느낀다.
빨간 자선냄비와 종소리만 남은 것도.
‘그 여러 번의 겨울이 반복되는 사이,
가난이 사라지기라도 했을까?’
어렸을 때 세상은 지금보다 알록달록했던 것 같다.
나이 들고 보는 세상에는 색이 많이 빠져 있다.
혹시 가난의 색도 그렇게
무채색으로 흩어진 건 아닐까?
문득 ‘키디’라는 어린이 영양제가 떠오른다.
효능 같은 건 알 수 없었지만,
그땐 그걸 사탕처럼 먹었다.
커서 다시 먹어보니 약간 한약 맛이 났다.
어린 입과 어른 입이 이렇게나 다른가,
잠시 어리둥절했다.
어쩌면 어린 눈과 어른의 눈도
서로 다른 색을 보는 건 아닐까?
같은 세상인데도,
언제부터 나의 눈은 채도를 조금씩 낮추어 보고 있던 것일까?
거지라는 말이 점점 입에서 멀어지고,
대신 더 점잖은 단어들로 세상을 부르기 시작한 무렵부터
가난은 사라진 게 아니라,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온도로
식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에서 치워진 가난의 모습은,
우리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달뜬 말들 아래에서
점점 희미해졌다.
오랜만에 마트 앞에서 자선냄비를 만났다.
주머니엔 현금이 하나도 없어서
결국 그냥 지나왔다.
물건 파는 마트 갈 때는
휴대전화 하나만 들고 다닌 지 오래인데,
불우이웃을 도울 때만큼은
아직도 손에 잡히는 돈이 필요했다.
그 종소리와 내 빈 주머니 사이의 간극이,
우리가 가난을 대하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그 거리는 생각보다 멀고, 조용했다.
휴대폰만 만져지는 빈 주머니를
괜히 한번 더 뒤적였다.
등뒤로 멀어지는 종소리가 거슬린다.
어쩌면 가난을 감출 수 없는 계절이
겨울인지도 모른다.
봄, 여름, 가을에 말끔히 접혀 있던 것들이
추위 앞에서는 다시 주름을 펴고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도 가난의 색은 여전히 빨갛다.
어쩌면 햇볕에 가장 빨리 날아가버리는
빨간색의 속성처럼,
햇볕 같은 복지의 장막 뒤에서
백 원만 아저씨는
얼어붙은 빨간 손을 지운 채
추운 길거리를 떠나
쪽방에 홀로 앉아 있지 않을까.
* 표지 이미지는 AI 생성 이미지를 활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