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책상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직접은 아니고 사진으로 보았는데, 원목으로 보이는 길다란 책상은 어지럽지 않고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특별할것 없어 보였지만 책상 너머 한쪽 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LP판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내가 가진 가장 비싼 물건보다도 더 비싸 보이는 스피커가 그 옆에 놓여있었다. 저런 작업 환경이라면 어느 글이든 다 잘 써질 것처럼 보였다. 한스 짐머의 작업실은 또 어떤가. 17세기 유럽 어느 나라의 근사한 레스토랑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개성이 있다. 실제로 하루키가 그 공간에서 글을 잘 써 내려갔는지, 한스 짐머가 그 작업실에서 곡을 잘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세상을 누비며 lonely planet이라는 여행 서적의 여행 작가가 되는 것을 꿈꿨었던 나는, 주변 환경의 변화와 다양성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글을 쓸 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매일 가는 집 앞 스타벅스에서는 이제 통 글이 써지지 않아, 오늘은 글 쓰는 환경에 변화를 조금 주고 싶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콜린 퍼스가 부인의 외도를 목격해서 사랑에 상처를 받고, 글쓰기에 집중을 하기 위해 개인 별장 같은 공간으로 가서 환경의 변화를 주며 글을 쓰는 장면이 있다. 나는 외도를 목격할 아내도 없었고, 내일 당장 청주 1박 2일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별장을 갈 수도 없었지만, 적어도 쉬는 날인 오늘 하루만큼은 어디로 떠나 콜린 퍼스 같은 작가의 흉내를 좀 내보고 싶었다. 이럴 때 애사심을 한껏 고취시켜주는 직원 항공권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이용하여 가장 만만한 제주도를 선택했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서는 돌아오는 비행 편이 결항되면 안되니 날씨를 확인해봤고, 다행히 결항될 일은 없는 날씨였다.
점심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당일치기로 일본이나 가까운 동남아시아 국가를 갔으면 항공사 직원으로서의 멋과 작가적 멋이 잘 어우러져 더 좋은 글이 써졌겠지만, 자가격리가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허세는 조금 참아보기로 했다.
직원 항공권은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대신, 좌석이 남아 있어야 탑승을 할 수가 있다. 찾아보니 다행히 여유 좌석이 있었고, 휴대폰을 들어 글 쓰기 좋은 곳을 검색하다 제주도 애월읍 어느 바닷가 근처 카페로 목적지를 정했다. 바다를 앞에 두고 글을 쓰고 있노라면 영감이 마구 떠오를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승객의 입장에서 비행기를 탑승하러 가는 길, 이 기분 좋음을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게이트와 길게 연결되어 있는 브릿지(탑승 통로)에 길게 늘어진 줄 속에 서서 기다리며, 그 풍경을 찍어 친구에게 보냈다.
"조종사들도 원래 기다렸다가 타?“
내가 비행기 타러 왔다고 하니, 출근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던 이 무지몽매한 친구는 내가 승객들 사이에 껴서 줄 서있으니, 조종사가 출근할 때도 승객처럼 줄을 서서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당연하지. 항공사 직원이라 해도 절대 새치기하지 않아."
당연히 모든 승무원들은 승객분들이 탑승하시기 전, 미리 기내에 들어가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며 승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아무튼 그렇게 제주에 도착을 해서 택시를 타고 미리 알아놓은 카페로 가고 있는데 선선하게 부는 날씨에 기분까지 좋으니, 갑자기 맥주가 너무 당겼다. 아니, 생각해보니 당일치기 제주 여행인데 일단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시작하면 너무 좋지 않을까. F. 스콧 피츠제럴드도 맥주를 매일 서른 잔씩 마셔가며 글을 썼다 했으니, 커피가 아닌 맥주를 좀 벌컥벌컥 들이키면 작가적 상상력이 조금 더 높아지지 않을까.
원래 가려고 했던 카페와 가까운 맥주집을 찾아보니 마침 낮 3시부터 여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낮 3시 20분, 그곳으로 갔다.
문에 OPEN이라고 걸려있는 팻말이 무색하게 안쪽에는 장사를 준비하기 위한 칼질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 시간에 방문한 내가 신기하다는 듯 멈칫하는 직원분은 이내 친절한 솜씨로 나를 안내했다.
큰 창문을 넘어 멀리는 바다가 보였고, 가까운 곳에는 겨울이라 그런지 경작이 끝난 논밭이, 그리고 그 중간 어딘가에는 잔잔한 파도가 치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상상력이 폭발할 것만 같은 광경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습윤해지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공간에, 낯선 사람으로서 방문을 하여 여행자가 되어버린 지금의 감정을 짐작해보니, 참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주문한 생맥주가 음식보다 먼저 나왔다. 단숨에 들이켰다. 모든 맥주가 그렇듯, 맥주는 첫맛이 제일 맛있다. 오늘은 어떤 비행 글을 써볼까. 저 앞이 보이는 구름이 참 비행기를 잘 괴롭히게 생겼다. 구름에 대해서 써볼까. 아니면 이 앞에 놓인 맥주와 비행의 상관관계에 대해 써볼까.
남자 혼자 와서 낮 세시에 안주를 세 개 시켜놓고 맥주를 벌컥거리며 마시고 있으니, 그 모습이 조금 처량해 보였는지 직원분이 오셔서 말을 걸어주셨다.
"오늘 날씨 정말 좋죠?“
날씨가 예뻤지만 좋지는 않았다. 조종사로서 이런 날씨를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측풍 성분도 강해 착륙하기에 쉬운 날씨가 아니며, 뭉게 구름이 낮게 깔려 활주로 식별에 방해가 된다. 강한 눈빛으로 점원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아 사장님, 날씨 정말 좋네요. 풍경도 예쁘고, 제주도 살았으면 매일 왔을 것 같아요."
자고로 친절한 눈빛에는 허세 부리는거 아니라고 배웠다.
옆에 노트북이 들어있는 묵직한 가방을 보시며 말했다.
"출장 오셨나 봐요?"
"아, 당일치기 여행 왔어요. 이런 풍경 보면서 글을 좀 쓰고 싶어서요."
"작가님이신가 봐요."
아니라고 해야 했지만 왠지 오늘은 한번 그렇다고 해보고 싶었다.
"아, 네 맞아요. 영감을 얻고 싶어서 왔는데 딱 좋네요."
"정말요? 책 제목이 뭐예요? 저희 가게에 좀 놓을게요."
"아직 한 권도 안 나왔어요."
맥주 한 모금에 취해서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사람으로 보였는지, 아니면 더 이상 말을 섞으면 피곤해질 것 같은 상황을 빠르게 눈치채셨는지, 재빠르게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오늘의 여행과 비행 글짓기를 어떻게 연결시키면 재미있는 글이 나올까 고민하는데, 바로 앞 정갈하게 쌓인 돌무더기에 새가 날아 내려오다가 방향을 휙 틀어 착륙을 했다. 여기서 새가 '착륙'했다고 표현한 이유는, 정말 그 모습이 비행기가 착륙하는 모습과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가끔 비행기를 타다 보면 그런 경우 있지 않는가. 동쪽 방향으로 날아가다가 공항에 도착할 때쯤 날아온 동쪽 방향을 바라보며 그대로 착륙을 하면 시간도 아끼고 연료도 아낄 텐데 가끔씩 반대방향으로 굳이 선회해서 서쪽을 바라보며 착륙을 하는 경우.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비행기는 착륙을 할 때 정풍성 바람을 맞으며 착륙을 해야 비행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이륙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한참을 날다가 잠깐 쉬러 내려온 새도 착지를 하기 위해 본인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인 정풍성 바람을 본능적으로 찾아 휘릭 선회를 하며 착륙을 했다. 심지어 나보다도 더 부드럽게 잘 내렸다. 하긴 쟤는 휴직 없이 매일 착륙하니까 당연한 일이겠다. 충분히 쉬고 다시 이륙하는 새는 이번에도 비행기와 비슷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날아올랐다. 새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니, 바람과 활주로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고, 오늘 당일치기 여행은 꽤 괜찮은 성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생각이 이 정도에 이르자 문득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캐치 미 이프 유 캔 영화 후반부 1:58:33초 쯤, 사기 혐의로 체포된 디카프리오가 톰 행크스를 따라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송환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디카프리오가 비행기 창문 밖에 있는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바라보며 44번 활주로라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디카프리오가 아무런 비행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파일럿을 사칭했다는 반증을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의도인지, 혹은 영화적 실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과디아 공항에는 44번 활주로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전 세계 모든 공항을 통틀어 지구에는 44번 활주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44‘번’ 활주로라는 명칭을 쓰는 것도 조금 어색하긴 한데, 활주로 44라고 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전 세계를 다 다녀본 것도 아니면서 활주로 44가 없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활주로 뒤에 붙은 숫자는 활주로가 가리키는 방향의 방위각을 기준으로 명명되기 때문이다.
1도에서부터 360도까지, 1의 자리를 빼고 10의 자리와 100의 자리를 기준으로 활주로 뒤에 붙을 숫자가 정해진다. 예컨대 활주로의 이착륙 방향이 010도를 보고 있으면 활주로 01, 270도를 보고 있으면 활주로 27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가 7차원으로 쪼개지지 않는 이상 방위각은 1도에서 360도까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전 세계의 활주로는 01부터 36까지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방위각이 334도면? 1의 자리를 뺀 활주로 33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말하는 활주로 44는 외계인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구는 아니다.
그리고 활주로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활주로가 설치되어 있는 공항에 자주 부는 바람의 방향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면, 이것은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원리와 연관이 있는데 어떻게 몇십, 몇 백톤이 넘어가는 비행기가 하늘에서 날아다니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로즈웰 사건 때 잡아들인 외계인을 고문시켜 외계 외딴 행성에 존재했던 기술의 정수를 얻어 만든 덕분은 당연히 아니고, 엔지니어들이 고심하고 고심하여 만든 엔진이 만들어내는 추력과 비행기의 공기역학적 디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몇 가지 원리로 인해 그 무겁고 큰 비행기들이 날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기역학적인 원리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비행기는 정풍을 받아내며 이륙을 해야 한다. 내 앞에서 착륙한 새도, 오늘 내가 타고 온 비행기도 모두 동쪽 방향을 바라보며 착륙을 했다. 오늘은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풍, 즉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비행기는 이착륙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게 되고, 배풍, 즉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할수록 비행기는 이착륙할 때 불리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하면 참 재미있지 않은가. 나를 막아내는 반대 방향의 바람이 이착륙 땐 나에게 도움이 된다니 말이다.
비행기도 그렇고, 내 앞에서 날아오른 새도 그렇고 코를 향해 맞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다. 맞바람이 강하다고 두려워하면 힘차게 이륙을 할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 좋은 일이 있기 전에는 늘 어느 정도 불편한 방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낸다면 우리는 더 높이, 멀리 힘차게 날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