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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파일럿 Mar 21. 2022

조종사인 내가, 게을러지면 안 되는 이유


"XXX!!"


불호령 같은 목소리로 브리핑실 안이 채워졌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고, 2번 브리핑실에 앉아있던 나는 자동으로 엉덩이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 누군가의 이름이 내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예!!"


어깨만큼 올라와있는 칸막이 너머, 1번 브리핑실에 앉아있는 기장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소리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나는 걸음을 옮겨 1번 브리핑실 앞에 가서 서니 처음 뵙는 기장님께서 앉아계셨다.


"너가 XXX이야?"


호통에 가까운 목소리지만,  뉘앙스나 언어의 느낌, 기장님의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해보아 화나신  보이지는 않았다. 묘한 안도감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긴장이   수는 없었다. 처음 뵙는 기장님께서  이름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예! 제가 XXX 부기장입니다!"

"얼굴 보니까 알겠네. 내가 널 어떻게 아는지 알아!?"


아까 내가 브리핑실 들어올 때 인사를 안 드렸나?

아니다, 분명 기장님 한분 한분께 인사를 드렸다.


내가 혹시 잘못한 게 있었나?

그러기엔 너무 처음 뵙는 기장님이었다.


나의 잘못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망설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기장님. 제가 기장님을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딱 보니까 알겠구먼."


갈 곳을 잃은 동공, 식은땀이 흐르는 등줄기와 뜨거워진 머리를 다시 한번 굴리며 내 잘못을 찾는 와중 기장님의 말이 이어졌다.


"너가 망고 파일럿이지?"

"예??"

"브런치 글 너 아니야?"

"아 예 기장님 제가 그 마.. 망ㄱ.."

"글재주 있더라."


브리핑실에는 다른 기장님들, 부기장님들, 심지어 객실 승무원 분들께서 분주히 돌아다니셨기에 브리핑실 중심에서 제가 바로 그 '망고 파일럿' 입니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에 순간 뭔지 모를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보다 다행이었던 것은 기장님께서 내 글을 봐주시고 나를 알아봐 주셨던 것, 그리고 내 글을 좋게 봐주신 점이었다.


"아 기장님, 부끄럽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아내가 글 읽고 우리 회사 부기장 아니냐고 묻더라고. 글 재밌더라."

"아 정말 감사합니다, 기장님!"


부끄럽고, 기장님 칭찬에 부러 아닌 척했지만 내심 기분이 정말 좋았다. 글 칭찬을 받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나를 알아봐 주시는 기장님과 이따금씩 마주치며 오다가다 인사를 드리다, 기장님과 또 다른 인연이 생기는 날이 왔다.


조종사는 6개월에 한 번씩 비상상황을 시뮬레이터로 훈련하는 것 외에도 몇 가지 평가 사항이 더 있는데, 그중 하나가 1년에 한 번씩 실제 비행을 평가하는 시험이 있다. MOT, 컴퍼니첵이라고 보통 불리는 것인데 이번 체크에서 나는 피평가자로, 나를 알아봐 주신 기장님께서는 평가자로 다시 만났다.


매년 한다지만, 평가라는 이름이 붙는 한 긴장이 안될 수는 없다. 거기에 내 글을 좋게 봐주시는 기장님이 평가자로 지정된 상황에 더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은 당연했다. 글만 번지르르하게 쓰는 부기장이 아닌, 비행도 열심히 하는 부기장이라고 보여드리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평가는 턱걸이로 간신히 넘겼지만 근 1년간 했던 비행 중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내 스스로의 조작이 다른 방법으로 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만 가득했던 비행이었다.


평가가 끝나고 브리핑실로 돌아와, 서류를 정리하며 더 나아지면 좋을 점들에 대해 간단히 디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 있으면 기장님께 여쭈고, 기장님은 그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짚어주시는 식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레이오버 호텔에서 꿀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등록이 안된 번호로 문자가 한통 와있었다.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설명해주려고 하는데 시간 되면 전화 줘'


기장님이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고, 기장님께서는 평가가 끝나고 내가 했던 질문 중,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여 내가 더 잘 이해하게끔 이야기해주고 싶어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사실 평가 본 날 이후, 나는 따로 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기장님께서는 그날 설명이 끝나고 내가 혹시 같은 실수를 나도 모르게 반복하다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사람은 무언가가 익숙해지면 편한 방법을 선택하고 그 루틴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니,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뭐든 처음에 열심히 해 놓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으면 이변이 없는 이상 익숙한 것을 반복하는데 그쳤던 것 같다.


그런데 나보다 경력이 수십 년도 더 많은 기장님께서, 이미 비행에 대해 충분한 고민을 하시고, 기준이 생기셨을 텐데도 이제 막 비행 걸음마를 떼려는 부기장의 더 나은 조작을 위해 다시금 매뉴얼을 펼치신다.


내가 게을러질 여유가 없다. 아니, 게을러지면 안 된다. 내가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여 언젠가 나 같은 부기장에게 비행에 대해 같이 고민해주는 기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만하면 됐다고 멈춰있으면 안 될 일이다.


조금 더 자주, 비행 노트를 열어봐야겠다. 내 실수들과 흑역사가 담긴, 열어보긴 싫지만 버릴 수 없는 졸업앨범과 같은 이 존재를 말이다.


다짐했으니 일단 넷플릭스 한편부터 보고 시작을..


아니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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