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한창이었던 2021년,
몇 없는 출근을 위해 공항 브리핑실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큰 통로를 기준으로 가운데쯤 브리핑실이 있는데, 내가 걸어가는 반대편 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반사적으로 나는, 마치 식당에서 나를 전혀 쳐다보지 않는 종업원을 향해 애타는 마음으로 손을 흔들듯 기장님께 인사를 했고, 이미 올라간 손과는 다르게 머리로는 0.32초 만에 깨달은 사실, '아, 맞다. 여기 회사 앞이고 기장님이시지.'
평소에 너무도 보고 싶던 기장님이었다.
가뜩이나 출근 횟수가 적어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우연찮게 마주친 것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이미 올라간 건방진 손과는 다르게, 머리로는 예의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한 손은 올린 채로 허리는 숙인 약간 괴이한 인사법으로 기장님을 마주하였다.
"기장님!!"
"어 망고야!"
"출근하시는 거예요?"
유니폼을 입고 브리핑실로 걸어오시는 게 출근 말고 무슨 경우가 있겠는가.
사회성 떨어지는 나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장님은 반갑게 답해주셨다.
"응, 오늘 어디가?"
"기장님 저 오늘 국내선 세 개 하고 부산가요."
"아쉽다 나는 오늘 청주 가는데."
"조만간 한 번은 비행 같이 나오겠죠 기장님."
"그러겠지?"
그렇게 나의 야심 찬 바람은 야속한 회사의 스케줄로 인해 근 2년 동안 기장님과 비행 한번 나오지 않다가
얼마 전,
드디어 기장님과 레이오버 스케줄이 겹치는 비행이 나왔다.
비록 같은 비행기로 근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대가 조금 다르게 같은 호텔에서 같은 날 묵는 스케줄이었다. 나는 오후에 도착, 기장님은 저녁에 도착.
먼저 퇴근한 나는 호텔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곧이어 기장님께서 랜딩 했다는 문자가 왔다.
서둘러 준비하고 기장님과 만나서 근황을 나누는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망고야, 나 책 다음 주쯤이면 나올 것 같아."
"진짜요!?"
기장님과 내가 친해진 계기, 그리고 가장 큰 공통점은 글이었다.
나도 대학생부터 꾸준히 여행을 하며 글을 썼고, 조종사가 된 이후에는 비행과 관련된 글을 썼다. 기장님 또한 조종사가 되기 전부터 비행과 관련된 글을 게재하셨고, 조종사가 된 이후에도 꾸준히 글을 써오셨다.
물론 실속 없이 웃기려고 환장한 내 글과는 다르게 정보와 지식으로 꽉 차있는 기장님의 글을 비교하는 것은 양심에 조금 찔리지만, 이렇게라도 글이라는 취미로 기장님의 취미와 내 취미를 동일선상에 놓으면 내가 핵이득이 아니겠는가.
아니아니,
아무튼 각설하고,
기장님의 첫 책이 드디어 출간을 앞둔 것이다.
"기장님, 책 나오시면 저 사인해서 꼭 한 권 주세요."
"아이, 당연하지"
사실 나의 책이 기장님의 책 보다 조금 먼저 출간이 될 예정이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출간이 조금 미루어져 기장님의 책이 먼저 나온 것이었다. 2년 동안 기장님과 비행에서는 만나지 못했지만, 책과 관련하여 꾸준히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책을 출간하기까지 기장님께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알았기에 마치 나의 책이 나온 것처럼 기뻤다.
그리고 출간하고 며칠 후,
나는 입사 후 처음으로 사복을 입고 브리핑실로 갔다.
근무가 없는 날, 기장님의 퇴근시간에 맞춰 기장님의 책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단정한 유니폼 차림으로 난무하는 공항 브리핑실에, 웬 시커먼 애가 거렁뱅이처럼 통 큰 청바지에 반팔티만 입고 앉아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최대한 악의가 없는 표정으로 사우분들께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고, 조금씩 커지는 민망함에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찰나 기장님께서 비행 디브리핑을 끝내고 나오셨다.
"망고야, 너 덕분이 커."
"아휴 기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브리핑실에서는 미니 사인회가 열렸고, 나는 기장님의 친필 사인본이 적힌 책을 받아 들었다.
이제 남은일은 하나다. 기장님이 유명해지시고 이 책이 잘 될 때까지 존버를 하여, 친필 사인본이 마치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초판처럼 수십, 수백억을 호가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안이 조금 힘들 때 당근마켓에 올려 가계에 도움이...
아니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기장님과 친해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 항공지식만 적혀있는 책이 아니라, 일반 직장을 다니던 사람이 어떻게 부기장이 되었고, 항공사 부기장에서 어떻게 기장이 되었는지의 과정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때 게임을 했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왜 있지 않은가, RPG 게임 가이드북에 레벨 1부터 고수가 될 때까지 어떻게 캐릭터를 육성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나와있는 책들 말이다.
아무런 배경 없이 캐릭터를 키우려면 답답하기 마련인데, 누군가 미리 걸어 놓은 길을 보면 괜히 용기가 생기는, 그런.
이 책은 다른 일을 하다가 조종사가 되고 싶은데 용기가 없는 사람들, 그리고 비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들, 나아가 항공사 기장의 생활을 입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후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들어있는 기장님의 깨알 같은 드립들이 정말 너무 웃기다. 그 드립들이 웃기지 않다면 내가 아재 감성이 있는 것이 아닌 웃지 않는 분들의 웃음이 메마른 걸로.
아무튼 그렇게 이 책이 잘되고 잘되어 친필 사인본 초판이 유명해지는 그럼 꿈을...
아니아니,
참.
이 글을 작성하는 것은 그 어떠한 지원이나 공갈, 협박(?) 따위는 없었다.
정말 순전히, 너무 존경하고 좋아하는 기장님의 기쁜 소식을 이렇게나마 표현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느 부기장의 축하글이랄까.
물론 기장님께 내가 소고기 한우 꽃등심 부위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리진 않았다.
왜냐하면 이 글은 기장님의 출간을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하는 어느 부기장의 축하글이니까.
그리고 물론 기장님께 내가 장어 소금구이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리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은 순수한 축하글이니까.
당연히 기장님께 간장게장 게딱지에 밥 비벼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리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아아, 이러다가 본심이 나와버릴 것 같으니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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