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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파일럿 Oct 10. 2021

출근하는 날, 눈 떠보니 오후 2시였다.


출근하는 날, 눈을 떠보니 오후 2시였다.


'하...'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절망의 한숨이 아닌 안도의 한숨.


내가 만약 일반 직장에 다니며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면 오후 2시에 떠진 눈을 그대로 다시 감았을 것이다.


그리곤 다음 직장은 어디로 다녀볼까, 이번엔 가까운 데를 지원해볼까, 출근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곳은 없을까, 혹은 지각을 해도 '하하하 여러분 제가 지각을 했지만 밤새 일을 하고 퇴근을 해서 밥값은 하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했을 때 '하하 자네. 참 괜찮은 청년이구만 그래!' 하는 상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알아볼까 등의 생각을 하며 인터넷으로 실업급여 신청절차를 알아봤겠지만, 다행히 지금의 직장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날은 오후 5시 20분까지 인천공항으로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괌을 찍고 다시 밤을 새우며 날아와야 하는 스케줄이었기에 느긋하게 늦잠을 잤다는 건 나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암막커튼을 걷어내니 나보다 훨씬 먼저 출근해서 사람들에게 더위를 발사하고 있는 태양이 보인다. 이미 중천에 떠서


'너는 어느 한심한 종자이기에 이 시간에 일어났는고.'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밤샘 비행을 해야 한다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나는 당당한 이두근과 삼두근으로 환기를 시키기 위해 거실 창문을 열었다. 맑은 공기가 그대로 창문을 관통하여 내 코 끝을 만지는데 처음 드는 생각,


'오늘 기류 괜찮을 것 같은데?'


혹시 코 끝으로 전해지는 바람의 강도만으로도 그날의 기류를 점칠 수 있냐며 역시 조종사는 다르네 하고 생각하셨으면 정말 잘못된 생각이니 접어주셨으면 좋겠다. 직업병 있는척하며 그날 혼자 기분을 올리고 싶은 어느 무지몽매한 부기장의 허세이니.


출근하는 지하철은 한산했다. 일반 직장인들의 보편적인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을 같이 공유하지 않는 직업의 장점 중 하나랄까. 안 그래도 복작거리지 않는 공항철도인데 그 시간마저 적당하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좌석인 끝 좌석이 대부분 비어있었다. 여담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네는 광화문인데 그 이유는 동네가 북적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많아도 동네가 시원시원하게 넓은 편이라 답답하지가 않다. 따라서 이런 취향을 갖고 있는 내가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에 대부분 출퇴근을 한다는 사실은 내 직업을 더 애정 하게 한다. 가끔씩 출근할 때 퇴근하는 사람들 보면 부럽긴 하지만.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시간이 맞는다 그랬나, 다행히 인천에서 괌으로 가는 비행의 기류는 좋았다. 정확성 0%에 수렴하는 나의 코가 오늘의 바람을 잘 느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좋은 기류가 오늘 나의 근무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인천에서 괌으로 갈 때는 승객석에 앉아서 쉬다가, 괌에서 인천으로 돌아올 때 듀티로 근무하는 2번째 조, 즉 이번에도 조종사가 4명이 타서 둘둘로 나뉘어 올 때 갈 때 근무를 하는 형태였다. 다시 말해, 인천에서 괌으로 갈 때는 승객 인척 위장하여 비행기 끝자리에 앉아 푹 쉬다가 괌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시 조종사로 변장해서 근무를 하는 그런 형태.


승객석에 앉아 쉬어가다 괌에 도착할 때쯤 되어 창문 밖을 보니 빗줄기가 창문을 후두두둑 치고 있다. 인천으로 돌아올 때 구름 피하느라 고생을 좀 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기장님께서 앉아계신 좌석을 쳐다보니 기장님께서도 마침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통로를 사이에 둔 채 각각 왼편과 오른편 창문 쪽 좌석에 앉아서 비행기에서 가로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에 떨어져 앉아계신 기장님에게 나는 비탄에 젖은 애절한 눈빛을 발사했다.


'기장님, 날씨가 참 야리꾸리하네요. 창문 싸대기를 때리는 빗줄기가 보이시나요? 제 마음에도 비가 내리는 것 같아요.'


괌에 도착하니 시계는 밤 12시를 가리키며 흘러가고 있었다. 기상이 좋지 않아 비행기가 구름을 요리조리 피해 다닌 탓에 다음 승객분들이 탑승하실 시간까지 그리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더욱이나 괌은 현지 사정상 모든 승무원들도 세관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더 촉박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서두를 수도 없는 일, 기장님과 나는 필요한 문서를 확인하고 비행 제원들이 잘 들어가 있는지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을 하며 비행준비를 마쳐가고 있었고 곧이어 사무장님의 콜도 울렸다.



"네 기장입니다."

"기장님 객실 준비 완료됐습니다."

"아휴 촉박했을 텐데 고생 많았어요."


비행준비에만 몰두하느라 정신없었던 나와는 다르게 기장님께서는 비행준비뿐만 아니라 승객분들은 잘 타셨는지, 그리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 고생하셨을 객실 승무원분들은 별일 없었는지 안위까지 챙기시는 모습을 보니 존경심이 절로 솟구쳐 올라왔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존경심으로 올려다보던 톰 홀랜드만이 나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사라져 가던 스파이더맨이 아이언맨에게 보냈던 그 눈빛보다 더 끈적한 존경의 눈빛을 기장님에게 발사하고 있던 내게 기장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제사에게 준비됐다고 말할까요?"


아참, 나 비행 중이지.


바깥은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아까 받은 항로 기상은 반갑지 않은 구름들로 가득했다. 다시 말해, 이륙하자마자 우리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구름들이 가득한 지역을 통과해야 하고, 최대한 그 강도가 심하지 않은 곳으로 우회를 하며 운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륙을 하고 다음 관할 관제사에게 컨택을 하니, 우리에게 지시를 준다.


"Turn left direct NATSS, any lateral deviation is approved."


해석을 하자면, 현재 위치로부터 400km 정도 떨어진 NATSS라는 비행경로상의 어떠한 정해진 위치로 좌회전해서 가는데, 대신 갈 때 위험한 구름이 곳곳에 있으니 비행기를 좌 우로 기동하여 피해 가라는 뜻.


해석을 또 해석하자면,

가는 길 위험하니 알아서 잘 피해서 가야 해.


해석을 해석한 문장을 또 해석하자면,

새벽에 졸리지 않게 구름들이 반겨주고 있는데 부기장 밥값은 할 거지?


이 마저도 잘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으니 자동차로 예를 들어 보겠다.

지금부터 400km를 운전해서 가야 하는데 경로상에 산적도 있고, 화산 폭발도 있고, 싱크홀도 있고, 도로 위에 압정들도 좀 흩어져있고, 뱀과 전갈들이 그득한 지역도 있는데 그때 들리는 내비게이션의 한 마디.


"전방으로 400km 직진 후 우회전, 온갖 장애물 너 알아서 피해 가십시오."


꽤 흥미롭지 않은가?


어쨌든 나와 기장님은 기상레이더를 열심히 보며 위험한 구름들을 피해서 가고 있었다. 한동안 열심히 기상을 피해 다니며 비행하고 있는데 앞에 너무 큰 구름들이 있어서 차마 돌아가기에는 불가능한 기상이 보였다.


제일 약한 지역을 찾아서 뚫고 가야 했던 상황, 구름과 구름 사이로 가기로 기장님과 이야기를 한 뒤 제일 약한 지역으로 기수를 돌리는데, 전방에 우리와 반대편으로 오고 있는 다른 비행기도 우리와 같은 공간으로 피하러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구름을 피해 가야 하는 두 비행기의 처절한 만남


"기장님, 앞에 비행기도 이쪽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저기도 피할 곳이 여기밖에 없나 봐요."


보통은 항공의 안전을 위해서 좌우, 그리고 상하로 간격 분리가 되어 있지만 이날처럼 기상이 극도로 안 좋은 날에는 좌우로 기상을 피해 다니게 되다 보니, 고도로밖에 간격 분리가 되지 않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 상황이었고.


반대편에서 오고 있는 비행기와는 1000 feet 즉, 300m 정도 위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300m라고 하면 내가 지금 가진 뱃살로 전력질주를 해서 50초 정도 걸리는 꽤 긴 거리라고 느낄 수 있지만, 비행기로 따지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만날 수도 있는 거리였다. 행여나 하강기류가 그 비행기를 쳐서 고도를 잃게라도 한다면 정말 가까워질 수도 있는 상황, 그 와중에도 최대한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 비행을 하고 있었다.


레이더에서만 보이던 반대편 전방기가 이제 육안으로까지 식별이 될 만큼 가까워진 상황,


"기장님, 저기 왼쪽에 트래픽 확인되었습니다."


눈으로 보니 정말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 드는 생각.


'와, 비행기 이쁘다.'


정신 나간 생각을 뒤로하고 나머지 기상을 요리조리 잘 피해 가니 어느덧 안정된 기류를 탄 비행기. 승객 좌석벨트 사인을 꺼주니 노곤함이 밀려온다. 긴장이 풀렸는지 한동안 말이 없이 날아오다 보니 어느새 해가 뜨고 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정말 아름다운 것 같다


일본 오키나와 위를 날고 있을 때쯤이었다.


"기장님, 비행 중에 해 뜨는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최근에 그 감기로 인해 국내선이 많다 보니 새벽에 태양이 뜨는 모습을 보며 날아오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조종석에서 보이는 여명. 다시 태어나도 같은 직업을 갖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해주는 풍경이다



"예전에는 이게 당연했었는데, 이제는 태양도 좀 반갑네."

"그러게요 기장님."


물론 반가움도 잠시, 어제와는 다르게


'녀석, 어제는 게을러터진 한심한 종자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열심히 사는군.'


이라는 표정으로 떠오르는 태양이었지만 계속 마주할 용기는 없었다.

기내에 있는 선바이저로 최대한 태양을 가리고 가다 보니 어느덧 인천공항 활주로가 보인다.


괌에서 승객분들을 인천공항으로 잘 모셔온 뒤 퇴근하는 길, 지하철을 타니 시계는 오전 7시 반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좌석에는 피곤에 찌들어 퇴근하고 있는 나와 정말 놀랍도록 똑같이 피곤에 쪄들어서 출근을 하는 직장인들이 보인다.


'나는 퇴근하지롱.'


어른스러운 생각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겸손은 미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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