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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파일럿 Sep 25. 2021

백번도 더, 아니 구십구번도 더 할 수 있는 명절비행

북적거렸던 김포공항의 추석



추석이었다.

명절이라 하지만, 우리네 직업은 명절이라 쉰다라는 사치스러운 개념이 없기 때문에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주섬주섬 유니폼을 입고 출근을 했다.


친구들 카톡방이 시끄럽다. 추석 연휴를 잘 보내라는 둥 전 부치고 있어서 힘들다는 둥 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지금 손님들 고향 모셔다 드리러 공항 간다 하니, 친구들의 걱정 어린 카톡들이 이어진다.


"야 진짜 고생 많다. 추석에도 일하고."

"명절에 일하면 가족들도 못 보고 어떡하냐."

"야 진짜 넌 돈 더 받아도 리스펙 해줄게."


아, 추석에 일을 하는 나에게 따듯한 문자로 위로해주는 이 착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이런 착하디 착한 나의 무지몽매한 친구들에게,

대신 너네 평일 아침에 눈 비비며 출근할 때 나는 오전 11시까지 꿀잠 때리고 일어나서는 넷플릭스 보며 평일도 휴일처럼 보낸다는 말은 차마, 정말 차마 하지 못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착한 친구들에게 불편한 진실,


아니,


불필요한 진실까진 내비칠 수가 있을까.

이래야 나중에 불쌍한 척하며 밥이라도 한번 더 얻어먹을 수 있기도 하고.


아니아니,

아무튼,

친구들에게 답했다.


"직업인데 별수 있나. 송편 맛있게들 먹어라. 난 비행하러 간다."


사실 근데 명절에 하는 출근이라 해도 별다른 느낌은 없다. 기분이 더 좋지도 않고 더 나쁘지도 않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회사원이 평일에 출근하는 그런 느낌, 그 정도가 전부이다. 애초에 스케줄 근무를 하는 내 직업에서 명절은 고사하고 주말이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평소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 요일이 아닌 날짜로 잡는 것이 일상이 되었을까. 일요일에 보자라는 친구들의 말에 '일요일이 며칠이지?'라고 반문하게 된다. 나에게 쉬는 날은 주말이 아니라 Day off를 받은 '어느 날'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출근길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날보다 오늘의 출근길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운 이유는 있었다. 마침 미국에서 같이 비행을 했던 친한 SH형이 오늘 내 비행기를 타고 고향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우연히.




비행 전 날,

우리 회사 비행기를 타고 울산에서 올라온다는데 혹시 스케줄이 있느냐는 형의 카톡에


"형 나 편수 XXX인데, 설마 XXX?

"니랑 내랑 요새 못 보고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함 보라는 갑다."


우리 회사가 아닌 지인이 나의 비행기를 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마음은 주책없이 설렜고, 추석의 출근길이 무겁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했던 일이겠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평소보다 세배는 넘게 사람들이 많다. 귀성길에 오른 승객분들이 많아서였을까, 김포공항은 마스크라는 것만 제외하면 코로나 이전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일 정도로 북적였다. 오늘은 두 레그만 하면 퇴근하는 비행, 김포에서 울산을 갔다가 다시 울산에서 김포로 돌아오면 끝이 나는 비행이었다.


기장님과 브리핑을 잘 마치고 북적이는 인파를 뚫으며 게이트로 향했고 우리는 승객분들로 꽉꽉 채워진 만만석 비행기를 이끌고 울산에 잘 도착을 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울산에서 김포로 돌아오는 비행.


비행준비를 마치니 승객분들이 타기 시작한다. SH형이 걸어오는지 보는데 괜히 마음이 떨린다. 언제쯤 걸어올까 보고 있는데 아기 승객분들이 참 많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탑승을 하지 않는 아기 손님에게 손을 열심히 흔들어주었다. 근데 손을 한번 흔드니 그 뒤에 있는 아기 손님도, 그 뒤의 아기 손님도, 그 뒤의 아기 손님도, 심지어 그 뒤에는 어머님 품에 안겨있는 아기 손님도 내 인사를 기다린다.


기장님께서도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이셨는지 우리 둘은 열심히 손을 흔들며 아기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기 승객 한분 한분 손인사로 만족을 시켜드리며 보딩을 시켜드리는데 그다음 순서 손님은 아기라기엔 좀 컸다.


아니, 좀 많이 컸다.

SH형이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손인사뿐만 아니라 손가락 하트를 날려대며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으면 칵핏에서 튀어나갈 뻔했으니까. 기장님께서는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같이 열심히 인사를 해주시며 오랜 친구의 조우를 같이 환영을 해주셨다.


내 비행기를 탄 형의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짠하다. 온도조절과 랜딩만큼은 내가 꼭 잘 해내리라 다짐의 다짐을 했다.


한바탕 인사가 끝나고 기다리는데, 배려해주신 기장님께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친구 탄다고 같이 인사해주시고, 손 흔들어주셨던 분에게 뭐라고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비행 가방에 들어있는 것뿐이라곤 헤드셋, 선글라스, 로그북, 물통, 칫솔, 치약, 지갑 등등 재미없는 물건들 뿐이었다.


헤드셋을 드릴 순 없고, 선글라스는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계실 테고, 물통은 내 입술이 닿아서 좀 더럽고, 칫솔, 치약은 말할 것도 없고,


지... 지갑..?


음...

일단 고민을 해보다가


희망을 갖고 다시 뒤적뒤적거려보니 손에 잡히는 기분 좋은 물컹거림.


홍삼포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틀 전 추석비행에 혹시 몰라 챙겨 놓았던 홍삼포였다.


쾌재를 외치며 주섬주섬 홍삼포를 꺼내어 기장님에게 드리려는데


"기장님, 고생하시는데 홍ㅅ... 응?"

"망고기장님 추석인데 홍ㅅ... 엥?"


기장님께서도 나에게 뭐 줄 거 없나 찾으셨던 것.

동시에 꺼내어진 홍삼포를 보며

기장님에게,


"기장님 저는 그럼 기장님께서 주신 녹용홍삼으로다가 먹겠습니다."

"그럼 나는 망고기장이 준거랑 내 거랑 둘 다 먹어야지."


감동이 흘러 넘친 기장님께서 주신 홍삼



홍삼포에 오고 갔던 추석 비행의 정.


명절에 일을 해도

이런 명절같은 비행이라면

백번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한 구십구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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