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훈련 - 2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글을 읽도록 만드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빠의 취향은 첫 줄에 있어. 글의 첫 줄이 얼마나 강력한 인상을 남기느냐,에 글의 성패가 달려있다고도 봐. 아빠는 보통 그 첫 줄을, 첫 줄 이후의 쓸 글의 요약으로 만들어. 요약이 아니라 요약으로 만든다고. 헤드라인이야. 헤드라인은 문장이고, 문장은 온갖 레토릭을 동원할 수 있어. 그리고 그 헤드라인은 다시 말하지만 너희들의 품격이야. 너희들의 생각 독백 자신과의 대화를 드러내지.
좋은 헤드라인을 뽑는 것은 훈련에 의해 가능해. 헤드라인을 의뭉스럽게 만들거나 의미 없이 분위기만 만드는 것도 가능해.
하나의 패러그래프를 두고 몇 가지의 헤드라인을 뽑는 훈련을 해보자. 역시 헤드라인은 개인적이야. 보편적인 것은 없다고. 거듭 말하지만 너희들의 글은 너희들이야.
이 사진 속의 키가 큰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은 색깔이 짙고 길이가 중간 정도이며 결이 뻣뻣하다. 얼굴은 통통하고 햇빛 탓에 눈을 감고 있으며 비스듬하게 서있다. 다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일자 스커트 안에 바짝 붙인 허벅지는 곡선이 드러나도록 골반을 한쪽으로 살짝 빼서 전체적으로 날씬해 보인다. 광대를 스치는 빛이, 하얗고 둥근 목깃이 나온 니트 안의 봉긋한 가슴을 돋보이게 한다. 한쪽 팔은 숨기고 다른 쪽 팔은 늘어뜨렸으며, 커다란 손과 시계 위로 소매를 접었다. 학교 정원에서 찍은 사진과 너무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다. 광대뼈와 더 커진 가슴 모양을 제외하고도, 2년 전 안경을 썼던 여자아이를 떠올리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길이 보이는 마당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시골 도시 변두리에서 볼 수 있는 대충 수리한 낮은 창고의 문 앞이다. 뒤로 높은 경사지 위에 심은 나무 기둥 세 개가 하늘에 또렷이 보인다. 뒷면에 '1957년, 이브토'라고 적혀 있다.
- 아니 에르노(신유진 옮김), 세월(1984books)
아빠가 좋아하는 '아니 에르노'의 소설 속 한 문단이야. 묘사로 점철되어 있지? 묘사가 요약이 어려워. 묘사라면 헤드라인은 창의적이어야 한다고. 꼼꼼하게 읽게 되지? 읽어봐. 묘사를 통해서 분위기는 물론 성격도 보일 거야.
'아빠의 헤드라인'은 이거야.
여자아이는 사진 속에서 여자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헤드라인을 뽑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글을 꼼꼼히 읽는 과정은 같겠지? 다른 장르의 글을 또 볼까? 이번엔 희곡이야.
당신을 나무라요? 멋진 말이군요.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나 아세요? 당신은 약해 빠졌고 게다가 어리석기까지 해요. 내가 모든 걸 바쳐서 다시 새롭게 삶을 시작한 지금, 당신이 그렇게 나약해하고 자기 자신을 비통해한다고 해서 당신을 돌보기 위해 내가 내 생활을 포기하리라고 생각하세요? 이렇게 감사해하고 있는 내 하루하루의 삶을. 당신이 그렇게 가련하지만 않았어도 난 당신을 한껏 비웃었을 거예요. 지그난 몇 년 동안 당신이 내게 한 걸 생각하면 치가 떨려 구역질이 날 정도라고요. 그래요, 그런 식으로 나를 보세요.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 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도 나는 뚫어지지 않아요. 난 강해졌어요. 내가 얼마나 많은 밤들을 당신을 때리고, 죽이고, 칼로 찌르고 하는 꿈을 꾸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내가 이렇게 서서 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서슴없이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얼마나 후련한지 당신이 짐작이나 하겠어요?
- 잉그마르 베르히만, 결혼생활의 장면들 중(마리안느)
아빠는 마리안느의 이 멘트 자체를 헤드라인으로 선정할게.
아무리 당신이 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도 나는 뚫어지지 않아요.
아무리 읽어봐도 이 멘트 만한 게 없네.
아빠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선생님이 떠오르네. 성함도 기억난다. 담배 피우시던 모습이 인상 깊은 분이었지. 선생님은 어떤 수업 중에, 교과서에 실린 한 편의 글을 문단 낱낱이 나눠서 문단별로 요약해 보라고 하셨어. 그러시곤 시간을 주셨다가 앞으로 나와서 칠판에 요약한 내용을 써보라고 하셨지. 아빠는 그냥 평범한, 성격도 평범한, 공부도 중간 정도하는 그런 학생이었는데 손을 들었어. 앞으로 나가서 요약한 한 줄 한 줄을 모두 칠판에 썼다. 선생님이 굉장히 좋아하시고 칭찬하셨어. 정말 좋은 훈련이었나 봐. 다른 과목은 몰라도 국어시험에는 늘 자신 있었거든.
그냥 요약만 할 줄 알아도 대단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