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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왜, 혼자 있고 싶어했는지

글쓰기 실제 - 2

by 현진현

엄마의 부재 - 아이들을 내가 챙겨야겠어.

식사 준비 - 재료부터 사 와야 하네.

설거지 - 한 번만 쓴 컵도 설거지통으로 들어간다.

배달음식 - 배달음식 용기도 설거지해야 해.

빨래 - 걷어야 널 수 있어.

청소 - 등교 후 아이들 방에 가보고 기겁했다.

주부 - 밤낮이 없는 극한직업이다.

집안일 - 이런 건 귀찮지만 그래도 할 수 있어.

아내의 부재 - 극단적인 외로움.

견뎌낼 수 있을까?

아내는 언제 돌아오나?

돌아와도 집안일만큼은 내가 해야지.


메모는 저렇게 되어 있다(고 치자). 아빠는 지금부터 글을 써 볼 텐데.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이야.

메모가 희미해지고 아빠 머릿속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아주 옛날이야기가 떠오르네.



당신에게 (제목이야, 글의 제목은 세상에서 서른일곱 번째로 중요한 사안이야.)


당신은 지금 고속도로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오고 있겠군. 솥에(작은 솥 있잖아요.) 밥을 안치면서 문득 옛날에 옛날에 당신 처음 만나던 그 시절에 당신이 가져다준 '불교철학사' 그 책 생각이 나는 거야. 당신을 처음 만나던 무렵에도 나는 뭐랄까 허무에 종속된 사람이었어. 의미 찾기가 두려웠어. 외톨이여서 그랬으려나. 관종이 되려고 얼굴에 허무를 묻힌 걸까? 잘 모르겠다.

당신에게 출가할지 모른다고 협박도 일삼았던 나였다. 처음 사귈 때 난 불교철학에 빠졌다고 당신에게 말했지. 당신은 집에 있던 책이라며 그 책을 내게 내밀었는데 암만 봐도 그 책은 새 책이었어. 또 한날은 내게 재즈에 관한 책을 내밀었고. (이종학 씨가 쓴 걸로 기억나네요.) 또 오디오에 관한 멋진 장정의 책을 선물했지요.(그 책은 결혼 1년 차 때였던 것 같아요.) 당신이 나 몰래 읽고 있었던 책도 아마 재즈에 관한 책이었지. 당신은 나와 가까워지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더라. 그런 당신을 나는 외면했더랬다. 나가서 노는 게 좋았어. 영화도 만들고 술도 마시고 회사도 다니고... 거침없었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잦았어. 당신에게 온갖 집안일을 맡겨두고 말이야.

중요한 건 내가 당신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점이야. 그게 사무쳐. 하지만 요즘 들어 당신을 조금은 알게 되면서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했어. 당신은 이제 혼자서 생각하고 거닐고 하늘도 바라보고 밥도 먹고 하고 싶은데 나는 이제야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아지는 거야. 몹시 이기적이다. 그렇지?

당신이 왜!

주말엔 어디라도 나가자고 했는지, 내가 출장을 가면 처형네를 갔는지, 아이들과 진지한 대화를 하라고 했는지,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지 말라고 했는지, 술을 조금만 줄이라고 했는지,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했는지, 출근하지 않아도 면도를 하라고 했는지, 일찍 잠들라고 했는지, 처갓집에 가고자 했는지, 그때만큼은 빨래를 널어달라고 했는지, 역 주변 말고 강 따라 걷자고 했는지, 애들 봐서라도 직장 견뎠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했는지, 평일 낮시간은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했는지, 친정 식구들을 집에 초대하고 싶어 했는지, 혼자 있고 싶어 했는지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당신의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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