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나오지 않는 아들

장편: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는 슬픔 (2)

by 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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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나오지 않는 아들



나는 외갓집이 없습니다, 로 시작하는 내 국민학교 친구 남윤철의 웅변이 생각난다. 윤철이와 가까웠던 나는 윤철과 담임 선생님의 부탁으로 윤철의 웅변대회를 참관했다. 그때 윤철이가 그렇게 웅변을 시작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윤철이가 진짜 외갓집이 없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외갓집이 있었고 돌이켜보면 외갓집의 분위기를 좋아했던 게 분명하다. 윤철이의 웅변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외갓집이 없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나는 그 웅변을 들으면서 외할머니께서 해주신 음식의 맛을 떠올렸던 것 같다.


어릴 적에 외갓집에 간다고 하면, 오늘은 엄청 맛있는 걸 먹겠네 하고 기대하곤 했다. 나는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삼촌들 숙모들 이모들은 물론이고 사촌들과 만나는 것조차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치 보상인 양 외할머니의 음식맛이 떠오르곤 했다. 그래, 확신할 수 있다. 외갓집 음식은 항상 맛있었다. 외할머니께서 만드신 음식들, 특히 명절 음식들은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맛있었다. 소문난 한식집엘 가도 외할머니 음식보다 잘하는 집은 지금까지도 찾기 힘들 정도다.

그리고 외갓집엔 인켈 오디오의 플래그쉽 모델이 있었다. 어머니는 가끔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야야, 외갓집에 가면 카세트테이프 몇 개 슬쩍 들고 와. 외갓집엔 옛날 노래나 트로트 노래를 담은 카세트테이프가 참 많았다. 외갓집엔 특히 최신 테이프가 많았는데... 어머니는 아마도 어린 내가 카세트테이프를 들고 오면 할머니도 삼촌도 아무 말 못 하실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는 명절마다 카세트테이프를 몰래 들고 와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다행히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아니라면, 들켰지만 못 본 척하신 걸 테지. 외갓집에 가기 싫은 이유는 또 한 가지 더 있었다. 외갓집은 사진관과 내실이 연결되어 있고 내실의 중간쯤 가면 작은 마당으로 통했다. 그 마당 한편, 그러니까 외부에 화장실이 있었고, 그 화장실 너머 이웃집에 돼지를 기르는 작은 축사가 있었다. 냄새가 지독했다. 화장실 걱정이었던 셈인데 그런 고충들 보다는 할머니의 음식솜씨가 이겼던 적이 더 많았다.

외할머니는 올해 백세 하고도 셋, 103세의 연세다. 언젠가부터 막내외숙모께서 살림을 맡았다. 외숙모께서 만드신 음식들도 맛없지는 않았다. 지금은 외숙모께서도 결혼한 아들네 아이를 봐주느라 주중은 내내 외갓집에 계시지 않는다. 요 전번에 들렀을 때 외할머니께서 동네 닭집에 전화를 넣어 찜닭 포장을 주문하셔서 함께 먹었다. 동네에서 소문난 닭집이라고, 할머니도 인정하시는 맛이라고 막내외삼촌이 귀띔해 주셨다. 하지만 단언컨대 내가 먹어 본 음식 중에 외할머니께서 해주신 갈비찜을 이길 맛은 이 세상에 없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쯤 다닐 때였다. 가끔 딸네와 아들네가 갹출을 해서 음식재료를 사서는 모두 둘러앉으면 외할머니는 신이 나서 음식을 하셨다. 할머니는 아마, 옛날에 그런 날이라면 술도 지으시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그날은 갈비찜의 날이었다. 그저 평범한 날씨의 알아서 오는 일요일이었다. 외할머니의 소갈비찜을 맛본 그날 모여 앉은 외가의 방계 식구들은 모두 그날을 잔칫날로 기억할 것만 같다. 잔치 음식처럼 풍성하고 신났으니까 말이다. 나는 여전히 외할머니 손맛이 그런 잔칫날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외갓집에서의 그런 날 대부분이 그랬듯 큰외삼촌과 큰외숙모 또 외사촌들은 볼 수 없었다.


지금의 외갓집은, 그러니까 면사무소와 마주한 북쪽은 사진관에서 내실로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딸린 살림집이었다. 조망을 해보면 사진관과 집이 붙어있는 모양이다. 사진관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는 작은 스튜디오가 있다. 조명도 있고 대형 트라이포드가 두 대나 놓여있다. 사진관 정면의 오른쪽에는 카메라들이 수십 대 놓인 진열장이 있고 그 뒤에 막내외삼촌이 앉아계신다. 진열장과 내실로 들어서는 사이에 작은 문이 하나 있는데 그 안쪽이 바로 암실이다. 이 암실에는 후문이 하나 있고 이 후문이 살림집 마당의 수돗가로 연결되고 수돗가 옆이 살림집의 대문이다. 나는 외갓집이라고 하면 지금까지도 이 집을 먼저 떠올린다. 개축을 한 맞은편 면사무소와 대비되어서 쇠락해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어릴 적 내 외갓집은 현상액 냄새와 음식의 풍요로움이 뒤섞인 외계의 멋진 공간이었다.

이 집의 큰길 건너편에 내가 취학하기 전의 외갓집이 있다. 외갓집이 언제 이사를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 최근에 외갓집을 가면 나는 큰길을 건너가서 이 오래된 외갓집을 보곤 한다. 이 첫 외갓집과 이 집을 둘러싼 주변은 폐허가 되어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곧 날이 풀리면 더 적극적으로 철거가 될 것처럼 보여서 갈 때마다 가 보는 것이다. 오래된 담벼락을 까치발로 넘어보며 어릴 적의 어렴풋한 기억, 특히 마루턱에 앉아 기타를 치는 둘째 외삼촌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이 오래된 외갓집은 전형적인 디귿자 구도를 가졌다. 꼬마 때를 떠올리면 이 외갓집은 대궐처럼 컸던 것 같지만 지금 와서 보면 방들을 다 합쳐봐야 열 개 남짓이다. 돌아가신 외삼촌은 디귿자의 한가운데 마루에 앉아계시길 좋아했다. 학교에 갈 나이가 안된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친정에 다니셨다. 어머니는 친정에 오면 남동생을 지켜봤다. 할머니와도 남동생 얘기만 하셨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어머니는 종종, “어째 식이가 꿈에도 안 나오노…”라고 혼잣말을 하셨던 게 기억에 남았있다.

외할아버지는 동네에서 한량으로 불렸다. 사진관을 운영하셨지만 외할머니에 비추자면 한량으로 여겨지실 수도 있었겠다 싶다. 할아버지는 허구한 날 낚시를 다니셨다. 오토바이를 즐겨 타셨는데 낚시터엔 어김없이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나셨다. 남매지는 지금 공원처럼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유명한 낚시터였다. 지금 보자면 외갓집으로부터 버스 예닐곱 정거장 정도의 거리다. 할아버지는 붕어를 낚으셨다. 그리고 외갓집으로 바로 돌아가시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또 예닐곱 정거장 정도의 거리에 있는 큰딸 집에 들러서 붕어를 주고 가시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형 나까지 네 식구가 저녁을 먹다 갑자기 들리신 외할아버지를 맞느라 먹던 저녁상을 물리고 일어서던 기억이 난다. 외갓집 외할아버지의 방에는 베이스클라리넷이 걸려있었고 외가의 조상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발령 조서도 서랍에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너무도 좋아해서 할아버지의 지병이었던 협심증이 젊은 날의 유일한 걱정이다시피 했다.

외할아버지의 삶은 외할머니의 삶과 대비되어 느슨해 보이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외가가 있는 동네에서 외할머니는 바지런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할머니는 옛 외갓집 디귿자의 그 집에서 하숙을 쳤다. 인근의 대학을 다니던 학생들이 하숙생이었다. 할머니의 음식 때문이었던지 하숙생은 늘 꽉 찼고 할머니는 늘 바지런히 움직이셨다고 한다.


야야, 내가 어째 하숙을 쳤노… 다시 하라카믄 못한다. 내가 음식을 할라카믄 식이나 멕일꺼로. 요새는 좀 보나? 식이 말이다 식이…

할머니는 무릎이 아파서 잘 일어서지도 못하는 딸을 주저앉히며 또다시 물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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