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의 기타

장편: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는 슬픔 (3)

by 현진현

3

둘째 외삼촌의 죽음



기타를 배우려고 했을 때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좋아하던 음악은 하드록이었다. 담요를 덮어쓰고 레드제플린을 들었다. 4집의 블랙독을 좋아했다. 그 곡은 담요맛으로 남아있다. 빨간 담요, 무늬가 가득한 빨간 담요는 기억나는데 그 무늬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호랑이 무늬였을까?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심야 라디오방송을 즐겨 들었다. 어머니는 전기세 때문에 내가 라디오를 켜두고 잠드는 것을 몹시 경계하셨다. 나는 FM25시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들었기 때문에 전기세도 전기세지만 늦잠을 자면서 꾸중을 듣는 경우가 잦았다. 그 시절이었다. 어머니에게 기타의 행방을 물었던 게.

외삼촌 기타가 외갓집에 남아있을까?라고 묻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러게, 삼촌한테 물어봐. 그래서 물어볼 작정이었는데 그 사이 어머니가 먼저 전화해서 삼촌에게 물어보고 외할머니께도 여쭤보고 하셨다. 없대! 식이 태울 때 같이 태웠대. 나는 곧장 동성로 바오로악기사로 가서 까만색 통기타를 사 왔다. 까만색이고 소형이었고 빨간색 바인딩이 있어서 아주 예뻤다. 헤드스톡에는 HYUNDAI라고 쓰여 있었다. 처음 친 곡은 당연하게도 블랙독과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기타를 사기 전에 두꺼운 마분지로 기타 넥처럼 만들고 가로로 여섯 줄을 그리고 세로로 플랫을 그렸다. 그 가짜 기타로 꽤 긴 시간 연습을 했었다. 카세트테이프를 플레이시키고 정지시키고 다시 플레이시키면서 그 종이기타로 따라 쳤다. 하지만 실제 기타를 잡았을 때 그 연습의 효과는 없는 듯했고 일 년에 걸쳐 아낀 용돈으로 산 기타를 안고 맹렬히 연습해야 한 덕분에 며칠 만에 블랙독 비슷한 멜로디가 나올 수 있었다.


기억 속에 있는 돌아가신 둘째외삼촌의 얼굴은 아무래도 첫째 셋째 막내 외삼촌의 얼굴들이 뒤섞인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다. 외삼촌이 돌아가신 때는 내가 국민학교 입학 전이었으니 기억이 없어지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단정하진 못하지만 그 외삼촌이 외삼촌들 중에 제일 잘 생긴 분이었다. 그리고 가장 따뜻했다. 외삼촌이 연주했던 기타 소리를 곰곰 기억해 봐도 떠오르는 게 거의 없다. 붉은색 선버스트 기타를 들고 있었고 앰프도 기타 가까이에 있었다. 마샬의 로고 같은 문양 정도는 기억나지만 그게 마샬이었는지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였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삼촌을 찍은 사진은 외갓집 액자에서 다 사라지고 아마도 할머니의 서랍 속에 한두 장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인지 늘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외삼촌을 화장하던 날도, 진짠지 가짠지 슬며시 떠오르기도 한다. 뜨거웠던 기억, 식이 삼촌은 뜨거웠던 기억 속에 있다. 어머니는 온몸이 붓도록 울었다. 그래서인지 그때 할머니가 어떠셨는지 본 기억은 전혀 없다. 아마 쓰러지시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고 저학년 때쯤이었는데 방송에서 식이 삼촌의 지병이 떠들썩하게 알려졌다. 전 국민 모금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또 우셨다. 삼촌의 지병은 심장판막증이란 거였다. 외할아버지께서 나중에 협심증으로 돌아가신 것을 보면 유전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외가의 다른 분들은 지금도 심장이 튼튼하다.

식이 삼촌 돌아가시고부터 어머니도 조금 달라지셨던 것 같다. 나도 잘 모르지만 분명 무언가가 달라졌다. 슬픔이 주는 변화였을까. 어머니는 해방되던 해 태어나셨다. 서른셋에 거대한 슬픔을 맞이한 것은 틀림없었다. 큰외삼촌과 식이 삼촌 사이에 어머니셨다. 바로 아래 동생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당시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외할머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코딱지처럼 붙어 다녔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만 있다. 살짝 할아버지의 담배 냄새가 기억나는 것도 같다. 명절이면 할아버지의 방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그렇지만 명절이 아닌 때 내가 뵌 할아버지는 방에 계셨고 방문 틈새에서 가끔 담배 냄새가 흘러나왔다. 얼핏 청자라는 담배의 디자인도 떠오르는 것만 같다. 내 형제 중 누나는 나와 네 살 터울이고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외갓집으로 보내져 몇 계절을 외갓집에서 살았다. 아마 세 자녀를 모두 살피기엔 어머니가 힘드셔서 그랬을 것 같다. 누나는 지금도 이모들과 아주 가까이 지내는 눈치다. 누나는 어머니 다음으로 외갓집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만 같다.


한날 아침, 누나와 형은 학교를 가고 나는 방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벽에 등을 기대셨고 혼잣말을 하셨다. 꿈에 식이가 나왔다 아이가. 내가 속이 이런데 엄마는 어떻겠노. 외삼촌이 돌아가실 무렵, 우리 가족은 반야월이라는 당시로서는 면소재지에 살았다. 우리 집은 아버지 직장인 우체국의 사택이었다. 분명히 기억나는 것 한 가지가 있다. 삼촌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사택 옆에 있는 분식점에서 10원짜리 만두(속에 당면이 가득 찬)를 먹는 내 앞을 긴 장례행렬이 지나갔다. 운구차가 별도로 있고 가족들이 탄 버스가 뒤를 따랐다. 기분이 이상해서 나는 먹던 만두를 뱉어버렸다.

사택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은 허름한 집이었다. 그 집 부엌에서 우체국 삼촌들과 피라미를 튀겨먹던 기억도 있다. 삼촌이 돌아가시고 시간이 좀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사택의 구들장이 어딘가 틈이 생겼던 모양이다. 우리 일가족은 연탄가스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다. 형이 방문을 열어서 우리는 모두 살아남았다. 우체국 직원이 우리를 발견했다. 형은 정신을 잃은 채 방문을 열고 다시 정신을 잃고 문간에 누워있었다. 누나는 이불더미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물론 어슴푸레한 기억과 들은 이야기의 종합이다. 누나도 형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물김치 국물을 마셨다. 연탄가스에는 물김치 국물이 좋다고 했다.

그날 오후였다. 외할머니께서 집에 오셨다. 생경했다. 외할머니를 우리가 사는 집에서 뵌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 이후에는 기억에 없다. 그날은 외할머니께서 저녁밥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밥을 삼키셨다. 우리 형제는 맛있어서 한 그릇씩 더 먹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화,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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