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다시 쓰기 No. 14
고향에 가서 명절을 '쉬고' 집으로 돌아온 새벽이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큰아이는 잠들지 않고 엄마와 아빠와 동생을 기다렸다. 집 안으로 들어선 나는 뭔가 이상한, 혹은 꺼림칙한 기운을 느꼈다. 거실을 보는데 기타의 위치가 이상하고, 기타 앰프는 뒤집어져 있다. "누가 왔다 갔니?" 사흘 동안 집을 지켰던 큰아이에게 물었다. "친구가 다녀갔어요." 그랬나 보다. "뭘 했어?"라고 물었다. "게임하고 기타 치고 놀고 요리를 해서 같이 먹었어요." 그랬구나. "친구 누구?"
큰아이와 친구는 안방에 들어가서-우리 집엔 거실에 TV가 없다-TV를 보며 요리한 음식-큰아이는 거의 요리사 수준이다-을 같이 먹었다. "엄마에게 얘기라도 하지 그랬어." 아내와 나는 아마도 동시에 '집안 정리라도 해둘 걸'하고 생각하고, 또 '안방까지는 너무 한 거 아니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나는, 유감스럽게도 '아, 뭔가 꺼림칙해'하고 느꼈고 그런 다음, '아냐, 아들의 친군데 뭐 어때'라고도 생각했다.
타인의 집으로 들어가는 정황을 아주 설렘 가득하게 표현한 영화의 대사가 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설레게 하는 카피다. 너무 유명한가?
라면 먹고 갈래요?
내게 물은 건 아니지만... 묻지도 않겠지만, 난 웬만하면 이성의 집으로 들어가서 라면을 먹진 않는다. 내 집으로 돌아가 끓여먹거나 사 먹거나. 라면의 의도를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타인의 집이란, 거대한 스트레스다
나는 그렇다. 타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건 그 타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자질구레한 모든 표정을 다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 집'이나 '내 집' 같은 말이 입에 배 있다.
그런데, 은수가 말한다. 우리 집에 가자고.
술에 취하진 않았지만 상우의 팔 벌린 실루엣에 취했거나 그날의 공기에 취했거나 멀리서 바람을 타고 날아온 꽃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상우는 타인의 집으로 들어간다.
영화는 또 다른 대사 하나를 뱉어낸다. 상우의 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타인의 집으로 선뜻 들아간 사람 치고는 바보스러운 카피다. 상우가 은수를 잊지 못해 끙끙 앓는 장면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아픔의 본질은 타인의 집을 상실한 데에서 왔다. 아니라면, 상우의 꿈이다. 묵호의 그 아파트가 자신의 집이었다는.
그는 동해가 바라보이는 그 아파트에서 차를 마신 것도 아니고 물을 마신 것도 아니고 침을 삼킨 것도 아니다. 그는 라면을 먹고 같이 잠을 잤다. 라면을 먹고 가라며 덤벼드는 여자를, 거리에서 그저 한 번 안아주고 보냈으면 이 사랑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단 한 번 봤지만, 상우는 몸으로 생각해버리는 캐릭터가 분명했다.
낭만은 본래 그렇다. 굉장한 아귀다툼이다. 다툼은 본능적이고, '마음이 가는 대로'라곤 하지만 '몸이 가는 대로' 다툰다. 자아와 또 다른 자아의 그런 싸움을, 마음이니 청춘이니 사랑이니 낭만이니 포장하는 것이 이 영화의 테마였다. 사랑이 본래 그렇다.
어쩌면 꼰대스러운 나는, 밥을 해주는 여자네 집엔 들어갔을지 모른다. 사랑은 본래 그렇다니까. 그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