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하세요

카피 다시 쓰기 No. 15

by 현진현

한자로는 이렇게 쓴다.

가지런할 整

다스릴 理

그래서


정리하세요


라고 흔히 말한다.


[冊]

학창 시절의 교재들이 아직도 거실에 꽂혀있다. 교재가 아니었던 책들도 꽂혀있다. 1993년 여름 방학 때 학교 앞 '직립보행'에서 샀던 "한국민중사"도 꽂혀 있다. 1997년쯤 선생님께서 주신 "시가 시학 연구"도 꽂혀 있고, 전공서적에 가까운 리처드 테일러의 "형이상학"도, 부전공 교재였던 "문예 비평론"도 있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권씩 샀던 "한국문학 통사"도 흩어져 꽂혀있다. 계간지들도 많다. 내가 쓴 짧은 서평이 실린 "문학동네 2000년 봄호"도 있고, 군대 가던 해 사 읽었던 "창작과 비평 1994년 봄호"도 있다. 아! "현대사상 창간호"도 있다. 빌려서는 돌려주지 못한 "작가세계 장정일 편"도 있다. 강석경의 "청색시대", 안정효의 "가을바다 사람들"도 있다. 세상에, 97년 가을의 "작가세계"는 박상륭 특집이다.

아내께서 오래된 책들을 갖다 버리라시며,


정리 좀 해


라고 말했다.

일단 '그래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못내 서러웠다. 어찌 되었든 정리해야 한다는 아내의 말은 옳다.


[사람]

적어도 나는, 적어도 한 번은 누군가로부터 '정리당한' 인생이다. 떠나간 많은 사람들, 앞으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 그렇지 않다면 만나더라도 정리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나를 가지런히 놓아두고 떠났고
나는 그렇게 가지런히 남았다


그런 어느 날,

불현듯 나를 버린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면 못내 견디지 못해 그 사람의 손길이 닿은 책이며 레코드며 주섬주섬 챙겨 넘겨보고 들어 본다. 그렇게 나는 가지런해지지만... 역시 못내 서러움을 삼킨다.

그 가지런함도 정성이다. 내가 그런 정성을 내비친 기억은 없다.

정리조차 하지 못하는, 거리에 서 있는 나를 본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리의 덕담을 한다.


안녕히 계세요


하지만 흔적으로 남았다.

그것도 정리라면 정리겠지.

P.S. 제발, 레코드 박스(LP 박스) 안쪽에 뭘 좀 쓰지 마. 정리를 할 수 없다고.


[시대]

'언어'와도 닮은 이 시대는 꽉 막힌 채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 언어처럼 조금씩 점진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크게 보면 '정리의 시대'이다. 전염 질병도 발생하고, 지진도 빈번하며, 연쇄 살인 사건도 이따금 벌어진다. - 마치 정리의 전조처럼 세상이 들썩인다. 적층 되는 주소록이 무거워 헐떡이는 나를 본다.

어떤 이름을 지우면서, 속 시원하지가 않아서, '대체 생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거야?'하고 자문해 보기도 한다.


[정신]

요즘의 정리는 묶고 다져서 다시 가지런해지라는 뜻보다는,

버릴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지 말라는 뜻에 가깝다.

내게 바흐의 첼로 모음곡 레코드가 제법 많다.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만 하더라도 4종을 가지고 있다. LP로 보통 세 장, CD로는 두 장이니까 물리적으로도 많다. 어떻게 정리하냐고?

아, 정신을 가다듬자.

70년대 필립스의 스튜디오 녹음이 가장 훌륭하다. - 그렇게 정신을 가다듬으면 바흐의 정신도 정리가 되는 걸까?

영화 밀양에서 '억울했던' 것은, 종교에 의지해 마음을 정리하는 범죄자의 정신머리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마음을 정리는 해도 정신은 정리의 차원이 아닌 것만 같다.


주변을 정리하면 마음도 가지런해지고, 마음이 그리 되면 정신도 맑아진다고 한다.

뜬금없지만


이별은 숙명이다


라고 주워 삼키면 정리가 좀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라면 먹고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