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다시 쓰기 No. 23
이젠 너무 늦었어! 이건 어머니가 자주 쓰던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말만 들으면 화가 치솟았다. 그 말을 하게끔 만든 사소하거나 중대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 말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접히는 방식 - 나는 이걸 네 살 때쯤부터 깨닫기 시작했는데 - 즉 구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는 그 시간의 주름에 대해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머니는 그 세 마디를 가볍게, 아무런 비애감도 없이, 마치 물건 값을 말하듯 얘기하곤 했다. 그런 차분함도 내 화를 돋우는 데 한몫을 했다. 어쩌면 내가 나중에 역사를 공부하게 된 건 어머니의 차분함에 내 분노가 결합된 이런 경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열화당, 2016)
존 버거의 이 대목에서는, 차원이 다른 얘기가 나온다.
이젠 너무 늦었어!
는 구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실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흔히,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
라고 말한다. 그럴 때도 물론 있고,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그저 늦은 때일 수도 있고...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늦은 때'라고 특정하는 걸 보면 '더 빨랐으면 좋았을 걸' 하는, '때'에 대한 아쉬움은 누구나 가지는 모양이다. 내 생각엔,
때란, 마지막 순간에 집약된다
말하자면, 죽음의 순간에 다다라서야 알 수 있다. '그때가 빨랐는지', '그때가 늦었는지', '그때가 적절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모른다는 뜻인가?
'때'는 '타이밍'이란 말로 쓴다. '골든 타임'이란 가치가 동반된 표현도 있다. 뉴스에서 수많은 '때'와 '타이밍'과 '골든 타임'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전제에 불과하다.
'때'가 중요하다면, '빨랐나 느렸나'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다, 지금부터
누구나 아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뉴스 프로그램이 대안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나날이 반복되는 '때'에 대한 지적은, 존 버거가 소설에서 어머니를 바라보는 심경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잘못되라는 듯 '구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프로치 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말이다.
나는 대체로 기자들이 싫다. (내 친구, 최 기자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