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다시 쓰기 No. 26
새삼스럽게 '인문학'이 나왔다.
뉴스에서 그랬다. 대략 '신천지는 인문학 모임을 빙자해 포교에 나섰다'. -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싶은데... 옛날 생각이 난다.
신은 죽었다
'인문학'이 이렇듯 빅 히트하기 전의 그 장엄했던 시절 말이다. 니체의 후예도 아니면서 심심하면 다 죽었다고 선언하던 그 시절의 인문학은 '문사철' 그러니까 문학, 사학, 철학이었다. 죽었니 살았니 하던 그 시절의 인문학은, 사실상 이것으로 먹고살 수 있니 없니, 하는 문제였다. - 오늘 추워서 들린 교보문고에는 '채사장'이라는 '아마도' 인문학 작가의 홍보가 입체 홀로그램으로 나오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학문적인 인문학은 늘 시시했던 것 같고 먹고살만해지면 언젠가 부상하리라 예견되었다. 인문학'스러운 것'은 아주 여유분이 넘쳐서 이념도 다룰 수 있고, 문학도 페미니즘도 다룰 수 있고 일상의 섹시함과 인간 내면 색정의 풍만함까지 다룰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인문학이 포교에 나선 것이다. 종교 자체를 인문학으로 볼 수도 있으련만, 경험상 개신교의 '전도'는 '나는 무척 이기적이오'하는 태도만 보여주었던 것 같다. 신천지가 인문학의 포장으로 포교를 했다면 과연, 신천지는 인문학의 반석이 되는 것인가?!
한데...
나는 철학과를 다녔는데(전공이라고 하기엔... 쩝) 인접해서 신학과도 있었고 윤리학과도 있었다. 많은 목사 지망생(?)들이 신학과도 다니고 윤리학과도 다녔는데 그 반목사들은 철학과에도 많았다.
그들에게 '왜 철학과를 다니죠?'라고 물어보면, 당연하게도 '목사를 하기 위해서요'라고 답했다. 마구잡이로 범박해지자면, 철학은 신학 아래에 저층에 도사리고 있지만 신학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사의 드립을, 철학을 바탕으로 신학적으로 증명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 논리이긴 한데, 신을 동원하지 않고도 목사나 사제를 이길 수 있는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신은 사망했다
죽을 수 없는 존재가 죽었으니 문장은, 언어도단에 불과하다. 유심히 보면, 그저 부고만 있었다. 결국 이 상징성은 여러 빌미를 준다.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말할 수 있게 되고, 신은 죽어서도 살아야 하는 굉장히 독특한 세계관에 사로잡힌다. 세상은 몹시 지루하게만 되어갔다. 신을 죽음과 인간적인 환생을 경험해가는 역사 속에서 잠시 반짝, 지루함을 덜었을지는 모르겠다.
나의 인문학은 좀 다르다. '나의 인문학'이라고 하니 상당히 거창하고 거친데...
어떻게든 점핑을 해보자. 나는 인문학을 어떤 '시간'이라고 본다. 헤겔의 예를 들면서 '황혼 녘' 운운하는 그 지혜의 시간이란, 적어도 내게는 새벽 3시부터 5시까지라 해 질 녘은 아니다. 자아와 주변의 인간들을 곱씹어보기 위해 문학이라든가 역사, 음악, 사진, 미술, 과학 등을 비유적으로 가지고 와서는 뇌세포를 자극하는 행위... 나의 인문학이다. 시간은 구체적이라야 한다. 그래서 3시부터이고, 5시까지이다.
철학은 지혜의 차원에서 지식의 차원으로 변화했다. 개념을 통한 관념의 해석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 본래 그런 것인가요? 가톨릭 철학의 대가들(보통은 교황)은 '죽음'을 논리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에서 그들의 철학을 완성시킨다.
말하다 보니 종교와 철학이 매우 가깝다. 그런데 좀 궁금한 것은,
신천지 같은 요한계시록과의 정체 불명확 종교는 도대체 인문학을 무엇으로 가르쳤을까 하는 점이다. 풍문에 몸 철학 운운하는 이야기도 있더라만 흰자위 없는 눈깔 속의 금테 안경, 아니 금테 속 그 동태눈은 인문학을 대체...
요컨대
우리는 가정한다.
신이 있다면
이라고 가정하고,
신이 있다면 저들을 벌하리라,
하고 주문한다.
그렇게 신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