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by 현진현

공기의 밀도감 운운하지만, 습도다. 습도는 굉장한 음악을 들려준다. 잉크를 묻혀 종이에 써도 번지는데 줄을 문지르는 음이야 어떨라고... 약진을 하더라도 순간 속에 사연을 담아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언제 한 번은 -꽤 오래전이다- 그 저명하다는 푸르트벵글러 말년의 베토벤 5번을 비가 내리는 날 들었더랬다. 생각했지, 베토벤 5번도 이렇게 들릴 수가 있구나 1950년대의 녹음은 연주자의 마음도 담아내는구나. 그런데 웬걸, 마른날 다시 들은 푸르트벵글러는 그냥 그랬다.

미당이 말당이 되기 전에 그랬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바람에서 느낀 것이 있긴 했다. 나는 대체로 안온한 것들을 감지했다. 무지막지한 찬 바람은 맞아본 적도 없었다. 군생활도 여름이 더 힘들었다. 바람이라면 뜨듯한 것들이 더 기억에 남아있고, 달리면서 맞는 바람으로부터는 업무에 쓸 아이디어 따위를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반면 내가 맞았던 비와, 내가 들었던 빗소리와, 그렇게 맞고 들으면서 비의 기분이 되어 쳐다봤던 당신들이 내 삶을 어찌어찌 만들었다.


마흔여섯 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빗줄기다


내가 들었던 레코드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중 비가 내리는 날은 또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겠다. 내 종이처럼 얇은 뇌도 비가 내리는 날엔 습자지가 되어 비를 틈타서 쭉쭉 빨아들였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 한, 비 오는 날은 술이 지루했던 건지 당신의 말소리가 잘 들렸다. - 팔 할까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절반은 비로부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악마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