觸: 나, 이방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방의 순례자들

by 현진현


아버지와 함께 대구백화점에 갔다. 동성로까지 가면서 버스를 탔는데 36번. 경산 중방동에서 출발한 36번은 고산을 지나고 범어동을 지나고 동성로로 접어들어서 중앙통에 우리를 내려줬다. 나는 열다섯 살. 백화점 4층인가 5층에 '풀리지 않는 신비'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가진 리바이스 말고도 'Lee"라는 메이커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청바지 뒷주머니에 범우문고의 문고판 책을 꽂고 다니는 겉멋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청바지만을 좋아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긴 한데... 헤르만 헤세의 '방랑'이나 알베르 카뮈의 '전락' 같은 책들의 커버가 스윽 떠오른다. 놀랍게도 Lee는 무지 저렴했다. 아버지께서 볼일을 다 보시고 나서 우리는 다시 Lee를 판매하는 매장으로 왔다. 그리고 다시 가격표를 봤다. 역시 싸다, 아무래도 싸다. 꿈같아서, 메이커 청바지를 살 수 있다니 하면서 다시 또 가격표를 보는데 아뿔싸 가격표는 벨트에 달려있다. 청바지에 끼워져 있던 벨트의 가격을 우리는 청바지의 가격으로 알았던 거다. 청바지 가격은 벨트 가격의 다섯 배쯤 되었다. 입맛을 다시며 다시 36번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죠다쉬의 뒷주머니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꺼내 읽었다. 아들 녀석이 2020년 가을 어제와 오늘 그 Lee를 입고 독서실로 향하더라. Lee도 리바이스 같은 불멸의 메이커였던가.

10대 땐 메이커를 입을 운명이 못되었던 것 같고, 내 20대에게는 '캘빈클라인 진'이 유행해서 그것을 몇 벌 입었다. 서울에서 첫 직장이었던 이태원에서 리바이스 짝퉁 인더스트리얼 진(프리 투 무브라는 캐치프레이즈)을 사면서 나는 드디어 리바이스 비슷한 것을 입어봤다. 돈이 넘쳐나는 것까진 아니었지만 오디오에 돈을 쓸 만큼 금전적으로 괜찮았는데 짝퉁을 사는 심리는 또 뭔지. 신혼 때의 사진을 보면 대부분 그 짝퉁을 입고 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서 말이다. 지난해 내가 다닌 마지막 남의 회사가 있던 코엑스 지하의 상가에서 리바이스 매장에 들러서 레트로 열풍을 타고 다시 출시된 그 인더스트리얼 데님을 한 벌 샀다. 이번에는 진품이었다. '메이커'가 아닌 브랜드 시대의 리바이스 매장은 널찍한 홀 쪽이 아니라 통로 한편에 있었다. 왠지 나는 이방인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고백할 내용도 아닌데 '고백하자면' 하고 부사를 붙이면서 말하는데 대학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태백산맥'이나 '고요한 돈'이 아니었고 '백 년의 고독'이었다. 가만 돌이켜보니까 태백산맥은 2000년도에 완독 한 것 같다. 물론 대학시절 보성군당에 간답시고 보성역에서 걸어내려 가서 짜장면을 먹은 적은 있었다. 여하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백 년의 고독은 정말 끝내준다. 재미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지금도 공들인 번역을 찾아서 다시 한번 읽고 싶을 정도다. 한번 더 고백하면, 나는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의 책 중에서 '아르세니예프의 생' 보다 '어두운 가로수길'을 훨씬 더 좋아한다. 마르케스의 단편집 '이방의 순례자들'이 그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써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의 단편들을 사랑한다.

20대 때 읽은 마르케스는 단편으로서의 완성도였다. 최근에 무려 서너 권의 책에서 마르케스가 언급되거나 발췌되는 것을 읽었다. 그게, 그러니까 마르케스 돌고 돌아 2020년에 다시 온 것이 순리 같은 거라고 느낀 것은 오늘 오후였다. 다시 읽은 마르케스의 연작 단편들은,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 모두'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나'이다.

'클리앙'이라는 커뮤니티 웹사이트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좀 있는 모양이다. 그중 한 사람이 미국에 거주하는 동양인을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과도 같다고, 퓨리탄의 후예들이 보는 관점을 이야기했다. 마르케스의 단편들에는 라틴아메리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을 떠나 유럽 등지에서 그저, 쓸쓸하다. 마르케스가 다루는 이방인들은 그의 단편, 그러니까 마술적 리얼리즘의 압축된 농담 속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살고 웃고 울고 죽고는 한다. 비교할 수 있는 고독이다. 비교할 수 없는 긴 시간의 고독보다는 살아있는 고독이다.

이해했다고 이해했던 마르케스를 지금 읽으면서 도대체 이해 불가한 표현들을 숱하게 발견한다. 헤세도 그럴 것이고 카뮈도 그럴지 모른다. 그렇게 책들은 또 나뉜다. 한달음에 다시 읽는 책이 있고 다시 읽으면 다시 감각을 잡아주고 재조정해주는 책들이 있는 모양이다.

다시 단편의 세계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마르케스의 단편은 재기 발랄한데 너무나도 재기 신랄한데... 40대가 되어서 다시 읽는 그의 단편은, 아무래도 남미의 암운을 뚫고 북쪽과 대서양 너머를 바라보는 완고한 노파의 쓸쓸함만 가득 묻어있다. (마르케스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다시 유럽 여행에 나서서 취재를 했다.) 나는 그것이 꼭 대한민국의 지금처럼 느껴져서 역시 쓸쓸하다. 아무것도 나눠가질 생각이 없는 저 한쪽 노파들 때문일까. 나나 우리나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방인 인척 하는 주인들이 분명한데 말이다.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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