觸: 정의의 발로

이수연, 비밀의 숲 2

by 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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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비밀인지 알 수가 없다. 집 근처 경찰서나 검찰지청을 지나치면 음산하고 더러운 기운이 느껴진다고 떠벌여 말하지 않은 것 정도가 비밀이 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아내가 좋은 말만 쓰라고 뱉는 말이 좋아야 자식들에게 복이 깃든다고 그 반대라면 반대라고, 그런 까닭에 부정적인 표현은 쓰지 말자 했는데 평촌역에서 지그재그로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오거나 범계역에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다 검경의 건물을 보면 이상한 기운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거기 대체 뭐가 있길래?라고 묻는다면, 그래서 그 물음을 곱씹다 보면 때 묻은 촉수들이 얽히고설켜 뿌리내리고 치렁치렁 뻗어나가면서 죽은 듯 자라나는 검검한 숲을 떠올린다. '이른바'가 되어버린 이른바 대검도 아니고 이른바 경찰청 수뇌부도 아닌데 말이다.

개천절 전날 시즌2의 15회까지 봤는데 별장까지 나왔다. 신문기사는 죄다 맛보기로 다룰 것 같은데 젊고 억울한 김 검사도 다룰까. 다루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싶은데 모르긴 몰라도 경찰 수뇌부를 다루는 걸 보면 디테일이 심하게 떨어진다. 일제로부터의 조직 구성을 이어받은 검찰이나 남겨진 친일파를 수렴한 경찰이나 거기서 거기인데 검찰 덕에 이미지 세탁을 한 경찰은 이 드라마에서도 그런 기운이 감돈다. 검경을 비슷하게 문제시하더라도 보기에는 검찰이 더 나빠 보일 수밖에 없다. 일단은 쥐고 있는 권력 덕에 위에서 군림하기 때문이다. 실제 시민들이 부딪히고 답답해하고 노여워하는 건 경찰 쪽이긴 하다. 어쨌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고, 이 드라마는 실제와는 먼 거리에 있다.

나는 검사나 검찰공무원이나 경찰이나 경찰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에 드라마 속의 장면을 사회적 의미로 치환하고 나서야 드라마의 실제성을 재단한다. 이 시즌2가 설명문에서 드라마로 전환되는 계기는 서검사의 납치였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가벼운 블랙 코미디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은 황시목의 수사 전환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목의 정의의 발로 때문이다.

섬나라의 코미디 영화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경찰은 경찰서 내 사무실에 폴리스라인을 설치한다. 영화라서 가능한 설정이다. 시목은 태하를 입건하고 정식 수사에 착수하기 위해 구속영장을 신청한다. 그렇다, '정의의 발로'다. 드라마에 빠져드는 건 분명 이 '정의' 때문이다. 꿈같은 세계에서나마 정의를 구현해내는 시목 때문이다. 현실 속 후배 검사를 때려서 목숨 끊게 만드는 이 나라 검찰에서 벌어지는 '정의'에 관한 문제이다. 드라마는 시커멓게 시궁창에 처박히지만 시청률은 오른다. 작가가 어떤 멘트를 쓰던 어색할 수밖에 없는 근원 속으로 나는 쳐들어간다. 쳐 들어갔더니... 나의 이상한 과거가 떠오른다.

과거 나는 어떤 대기업의 시시콜콜한 뒷일을 다루기도 하는 계열사에 다녔다. 키가 멀쩡하니 크고 선하게 보이는 직원이 팀에 있었더랬다. 팀장이랍시고 좀 거칠게 다루던 어느 날, 대표가 나를 강남의 밥집에 불러냈다. 회사는 분당에 있었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여유 있는 분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팀원의 부친은 더 큰 대기업의 임원이고 그 기업에서 우리 회사로 얼마치의 일감을 주는 대신 그 팀원을 채용하게 되었다는 것이 대표의 설명, 따라서 팀장인 내가 그 아이를 좀 관대하게 다뤄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팀원의 부친은 대표와 만나서 자식 놈이 코피를 흘리고 응급실에 실려가는 등의 고충 가득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식의 평안을 당부한 모양이었다.

나는 가만히 고요하게 며칠을 생각한다. 팀원은 업무 능력이 매우 떨어졌다. 그는 부친과 자신과 회사들의 부정을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을 즐기는지 견디는지 두고 보는지는 내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몇 달을 더 다니다 그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그 부자를 잊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세상의 정의 중 하나는 '기회의 균등'이 아니던가.

물론 내가 다녔던 그 회사는 정의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정체성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굳이 정의라면 경제활동에서의 정의 정도 아니었을까. 대충 봐도 검찰과는 완연하게 다르고 수사권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드라마 속의 검찰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인격 속에는 모름지기 '정의'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정의의 형평성은 대체 어디를 향해야 할까. 당시 친구 녀석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는 이런 대강의 이야기를 했다. "환경운동이든 정의가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든, 후세들 내 자식들을 위해 한다는데 말이야. 나는 그게 와 닿지를 않는다고. 내 자식이 둘 있지만, 내 자식의 친구들과 친구들의 친구들 하면 무한할 테고... 난 도무지 다음 세대를 위한다는 게 와 닿지를 않아. 그래서 정의롭게 산다는 건 어려운 건가."

내 자식이 불편을 겪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그 대기업들에 양심발언을 하지 않은 일 말이다. 그저 모르는 사람들의 일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도로 한 중간에 유기된 사체가 내 가족이 아니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기는 최근, 내 아들 녀석과 경찰 사이에 벌어진 어이없는 사건 이후로 그 음습한 경찰서의 기운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장을 보고 걸어오는 길이면 나는 경찰서를 지나지 않는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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