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의 세계
정유정의 소설, [완벽한 행복]을 읽었습니다. 현재의 우리 대중소설의 수준과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저의 독후감인데요. 그 경향이라 함은 장르적이라는 것이고 수준이라 함은 문학성이 도드라지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입니다. 스릴러 장르로 파악되는 이 소설은 '완벽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사실 질문은 맹목적이고 공허합니다. 또 대중소설로서는 갖출 수 있는 덕목들이라면 최고치를 갖추었다고 읽어냅니다. 특히 이야기성과 등장인물의 캐릭터화가 흥미롭고 손에 잡힐 듯합니다. 이런 극찬은 평소의 제 버릇이기도 합니다만...
눈에 띄는 것은 이 소설의 테마입니다. [완벽한 행복]의 주제의식은 '슬슬' 편안하게 (내용은 전혀 편안하지 않죠.) 이것저것 엮어버립니다. - 이런 게 카피적이지 않다면 무엇이 카피적이겠습니까? (띠지에 주제가 명기되어 있습니다.)
[자기애의 늪에 빠진 삶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자기애', '늪에 빠진 삶', 그리고 '자기애의 늪에 빠진 삶'. 주어를 구성한 이 단어의 조합과 구절들의 의미화는, 소설에 비하자면 '슬슬'을 넘어 '술술' 연결시켜버려서 속 시원하긴 합니다. 한편 소설은 이 카피보다 더 무겁고 복잡하고 다채롭고 어두우며 당혹스럽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제 삶은 또, 소설보다 훨씬 더 무겁고 복잡하고 다채롭고 어두우며 당혹스럽죠. 하여간 저 카피는 단순하긴 하지만 진실에 가깝습니다. 하나 더 덧붙여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에서 가장 당혹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장치는 '구성의 순접'입니다. 보통은 권선징악이라고 부릅니다만.
요컨대 저 카피는 어떤 삶(신유나의 삶)에 대한 간명한 진실을 간단하지만 적확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의 카피라이팅도 본질적으로는 그런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설명드렸던 바가 있는데 '월드컵 경기장'의 네이밍 사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암동의 그 월드컵 경기장의 이름을 지을 때 많은 카피라이터들이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긴 시간 숙고 끝에 나온 결론을 스테이트먼트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월드컵 경기장을 월드컵 경기장이라 부르지 못한다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또 하나의 예입니다. 철학과에서 시험을 봤습니다. '도(道)에 대해 서술하시오.' 성적이 나왔는데 한 학생이 에이플러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학생의 답안지에는 단 한 글자, [道]가 써져 있었습니다. 길고 긴 서술을 했던 학생들이 항의를 했다고 하죠. 선생의 대답은, 에이플러스의 답지에서 틀린 점을 찾아보라, 하나도 없지 않으냐!
최근 수도권과 특히 우리 경남에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였습니다. 카피라이터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감염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뿐입니다. 이 방법이 반복되어 왔고, 앞으로도 반복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반복되는 메시지로써 도민들이 겪을 피로감보다 방역지침의 준수로 확산되는 코로나를 막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철저한 방역지침 준수로 우리의 경상남도를 지켜주십시오]
발화자의 입장에서는 다른 그 어떤 카피만큼이나 감동적인 카피라고 믿습니다. 다만 청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카피를 써 본 사람들은 알 텐데... 카피의 세계란, 카피의 세계이지 멋진 카피나 명문의 세계는 아닌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