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의 카피

카피의 구체성에 대하여

by 현진현

타이어의 트래드, 그러니까 타이어에 팬 그 라인 말입니다, 트래드가 1초에 몇 리터의 물을 퍼올려야 차가 빗길 주행에서 미끄러지지 않는지 아시는지요? 무려 4리터라고 하더군요. 이 정보를 타이어 광고에 활용하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 언젠가 어떤 신문의 인터뷰 기사에서, 인터뷰이인 이발소의 면도사의 얘기 - 수염은 전부를 깎으면 안 된다, 0.2미리 정도를 남기고 깎아내야 한다, 가 잊히지 않습니다. - 잊히지 않는 것들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구체성입니다.


재수감되시는 날, 인트라넷에 사장님(밖에서 이렇게, 지사님을 지칭하곤 했습니다.)의 퇴직인사가 올라왔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에 그 퇴직인사를 읽었습니다. 낮에는 교도소 앞에서 사장님을 기다렸습니다. 힘내시라고, 사람들은 당신 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거든요.

저는 사실 사장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지난겨울 도청에 출근해서 직접 뵙기 전에는, 그저 노 대통령을 모시던 보좌관 출신 정치인 정도로 알았습니다. 저는 청년 정책 이슈의 사장님 일정은 모두 따라다니며 취재를 했었습니다. 사장님의 요청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저는 그렇게 그의 육성으로 그의 카피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닐곱 번의 차담, 한두 번의 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의 메시지와 화법을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 요컨대 사장님이야말로 구체성의 카피를 구사하셨습니다. 경황 중, 사장님의 퇴직 인사 하이라이트는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울경메가시티, 청년정책, 서부경남KTX, 스마트그린산단과 산단대개조, 소부장 특화단지, 진해신항, 가덕신공항, 달빛내륙철도, 광역철도망, 통영 한산도와 욕지도 육지 연결 국도 연장, 창업 생태계 조성, 제로페이 도입, 지역인재혁신플랫폼, 통합교육추진단 설립, 기후위기 대응 체제 구축, 사회혁신과 도정혁신, 광역푸드플랜, 반려동물 진료비 공시제,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사회서비스원과 경제진흥원, 여성가족재단과 관광재단 설립, 사회적경제혁신센터, 컨텐츠기업지원센터, 스포츠산업육성센터, 스마트재난관리시스템, 농촌유토피아 사업, 치유농업확산센터, 스마트팜과 스마트양식 시범사업, 섬 가꾸기 사업, 가야역사문화 복원 사업, 수소경제와 미래모빌리티 산업 육성, 무인선박 규제특구, 강소연구특구, 방위산업혁신클러스트, 도립 예술단 설립 ......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미처 생각나지 않은 많은 사업들도 여러분의 손을 거쳐 경남의 미래를 위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 퇴직 인사도 무척 구체적이고요, 저 사업들 하나하나에도 거대한 구체성이 숨어있습니다. 사업들은, 개별 사업의 구체적 요소를 통해 서로 연관이 됩니다. 그런 구체적 요소에 대한 충분한 습득 없이는, 통괄 사업이라 할 수 있는 [부울경 메가시티]를 설명해내지 못합니다. 사장님은 몇 시간이고 이 모든 사업들을 연관 선상에서 정책적으로 설명하곤 하셨습니다. - 지금 도청에서는 금세 구체성이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정책의 구체성을 사장님께 빚졌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체성은, 놀랍게도 비유라는 수사법으로도 가능합니다. "왜 나는 넘어진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을까?" 같은 추상적 카피도 따져보면 '구체성을 통한 추상성'입니다. '아이'를 통해 '모든 넘어진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일견 개념적으로 보이지만 '넘어진 아이'가 구체성을 동반합니다. 같은 라이터의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레토릭은 비유를 지향하지만 전달력은 '넥타이'라는 구체성과 '청바지'라는 구체성이 가집니다. - 분석하자면 그렇다는 말씀이고요.

인도에서 집행된 현대차 [베르나]의 광고는, 63마력이라는 성능을 전달하기 위해 실제 예순세 마리의 말을 비주얼로 활용했습니다. 거대 캠페인이라고 할 수 있는 [RE 100]은 100이라는 숫자로 그 목표의 구심점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카피의 구체성이란 카피 쓰기의 시작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워싱에서도 구체성의 관점에서 카피의 메시지가 환기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구체성이 몸에 베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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