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을 어지럽혀요

카피 다시 쓰기, 20211004

by 현진현
IMG_0027.jpeg 계절이 바뀌면...


'똥꼬가 시큰하다'는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치질처럼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고요. 물리적인 것에 더해서 감성적인 지점이랍니다. 콧날이 시큰해진다는 표현을 아시잖아요? 콧날은 타자에 관한 것이에요, 과거에 관한 것이고 자신에 관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건 과거의 추억에 관한 것이죠. 그래서 콧날이 시큰해지면 곧 눈이 아파오는 것입니다.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이 아파 오네요. 그것이 사랑이란 걸...) 반면 '똥꼬'는 현재에 관한 것이면서 미래에 관한 겁니다.

록밴드의 음악을 좋아하던 시절에 저는 길을 걷다가도 거리 저 너머에서 킥 드럼의 쿵하는 소리만 들려와도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똥꼬가 시큰해왔습니다. 몸이 반응하면서 그 반응의 신호가 척추를 타고 뒤늦게 이성으로 들어옵니다. 록밴드 이후에 똥꼬가 시큰해오는 순간이 몇 가지 있습니다. 마음에 내키는 의자를 발견, 정말 마음에 드는 향기를 발견, 아내의 미소를 발견, 가질 수 있는 사진을 발견... 그런데 무엇보다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을 발견했을 때 정말이지 찌릿하더군요. '브런치'라든가, 조금 전 소개받은 '얼룩소'라든가, 손에 맞는 워드프로세서를 찾았을 때나... - 모든 것이 가능성입니다. 현재의 가능성이라고 해도 좋고 미래 자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순전히 심미적으로 활용된 워딩은 아닌 것으로 읽힙니다만 책상 전문 가구 브랜드 '데스커'의 CM에서 '가능성 앞으로'라는 카피가 나옵니다.



DESKER

SMARTER

DEEPER

WIDER

BETTER

무엇을 하든.

더 당신답게.

가능성 앞으로

MORE THAN A DESK

DESKER



똥꼬가 시큰한 정도는 아닙니다만 기분 좋게 들립니다. 모니터 속의 플랫폼이 아닌 현실의 플랫폼이잖아요? 저 비교급 'er'들이 가능성의 세부들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는 다른 포인트 하나가 바로 가능성이나 가능성의 세부가 책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본래 책상(冊床)은 책을 보는 상이거든요. 무려 책을 읽는... 책 읽기만으로도 2021년에 와서는 거의 인문학적이고 그래서 이 CM의 카피를 '인문학적'이라고 우겨볼 수도 있겠습니다.

첫 회사에서 이직해 두 번째 회사에 윗분으로 만난 김CD님 생각이 나네요. 그분도 다른 회사에서 이직을 해 오셨는데 이직 조건에 놀랍게도 의자가 있었습니다. 허먼 밀러(Herman Miller)의 '에어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의자가 '가능성의 일종'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데스커의 물리적 철학은 저 카피로 잘 전달되었다고 보고 조금 더 심미적으로 풀어보고 싶은데요.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하게 책상 정리를 하고 나서 시도해 볼게요. - 하지만 저는 어지럽혀진 책상이 좋습니다. 방은 깨끗하게 치워뒀는데요 뭘.



노트보다 크게

모니터보다 크게

키보드 자판보다 크게

당신의 생각을 펼쳐보세요

책상이야 어지러워도 좋아요

책상 위에 실컷 펼쳐보세요

MORE THAN A DESK

DESKER



이사를 준비하면서 책상을 주문할 작정입니다. 아웃도어용 식탁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식탁은 책상보다 낮아서 불편합니다. 아이들의 책상도 바꿔주기로 하고 두 개의 책상을 더 골라뒀고 컨펌받을 예정입니다. 멀리서 드럼 세트의 하이햇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