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에 대한 백신

카피 다시 쓰기, 20211005

by 현진현
바다 혹은 섬


제주에 내려간 아는 분이 식당 물병에 붙은 스티커를 사진으로 찍어서 SNS에 올리셨더군요. 그 스티커의 카피는 강하면서도 깔끔했습니다. 꽤 옛날인데도 깔끔함은 여전하네요.



아무리 잔재주를 부려봐도

한라산의 맑은 물은

넘어설 수 없습니다

강하면서 깔끔한 한라산



본질에 가까운 건 단단하고 깊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저 카피가 술의 본질을 말하는 건 아녜요. 비본질적인 본질이 본질적이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저 술을 마셨을 때 목마름을 없애버리는 강함, 묵직한 안주를 부르는 뒷맛의 깔끔함, 그런 속성들이 경험적으로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 카피와 경험적인 사실이 일치할 때 그 카피는 제품의 본질이 되어버려요. 그땐 술이 아니라 그저 '한라산'인 겁니다. - 흔히 브랜딩(branding)이라고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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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술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취함? 술맛? 술맛에 취함? 삶의 고단함과 희열에 취함? 하여간 '그 순간부터' 한라산의 본질은 강함과 공존하는 깔끔함입니다.

이전에도 한라산 소주를 마신 적이 있지만 저 카피를 본 이후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더러 찾아서 마셨다는 얘기지요.) 그러던 어느 날, 신문 기사를 하나 봤는데 한라산 소주가 동물 축사의 폐수로 술을 만들어 온 사실이 적발되었다는 거였어요. 제조사 측이 사과를 했는지 기사 내용을 부정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부디 개선되었기를 바라면서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라산을 마셨던 겁니다. - 그 무엇의 본질이 아닌 술의 본질이란 건강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재미로 몇 가지 덧붙이면… 한라산은 제주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얘기, 맑은 병 도수 높은 한라산만이 진짜 한라산이라는 얘기, 제주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 안주와 마셔야 제맛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 한라산 소주는 섬, 관광지, 한라산 등의 이미지가 중첩된 데다 높은 도수의 독주스러움이 목 넘김을 결정 지워주는… 그러니까 술다운 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주섬주섬 배낭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냅니다. 두 사람 겨우 앉을만한 돗자리에 걸터앉아서 한라산을 바라봅니다. 돔배 고기 몇 점 입에 넣고 씹어보다 목마름이 오는 순간에 강하고 깔끔한 그 순간을 중첩시킵니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그 속 시원함이 제발 당신을 잊게 해달라고 비명을 지르는군요. '순이삼촌'의 땅에서 바다 건너를 한 잔.



섬에서 한 잔

바다 건너 한 잔

강하고 깔끔한 당신이 떠오르고

한라산을 한 잔



생에 대한 백신처럼 독한 술을 한 잔 하면서 2021년을 마무리해야지 하는 계획이 섭니다. 물론 제주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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