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문화’ 혹은 ‘게임 그 자체’에 있어 비평론은 주요한 문제지점 중 하나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하는 듯하다. 그 까닭은 어쩌면 게임제네레이션에서 강신규가 「한국 게임비평의 궤적과 방향」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기존 국내 게임비평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대개 게임의 서사나 시스템적 요소를 훑어보는, 소위 ‘리뷰’에 머물러 있다는 지점 혹은 ‘게임 텍스트의 구조적 문제나 플랫폼과 장르의 문제’라는 지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국내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예컨대 게임과 그것의 문화를 결부시켜 함께 비평하는 방법론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게임의 기술적 측면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게임 자체와 게이머에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평가하는 식의 비평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게임의 서사적 구조와 그 레벨 디자인이 어떠한 식으로 결합하여 나타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유의미한 비평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본 게임들은 모두 일인칭으로 진행되며, 게이머가 그것의 서사에 집중하고, 몰입하게끔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은 결국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지 못한다. 오히려 이는 우리를 유령처럼 게임의 주변부에 머무르게끔 할 뿐이다. 즉, 게임 그 자체를 다루거나 그것에 대해 비평을 할 때 이따금 무의미한 순간이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비평가가 게임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을 주저하게끔 하며 무력감에 젖어 들도록 한다. 특히 ‘게임은 예술인가?’와 같은 질문이 던져질 때 이러한 경향이 심해지는데, 많은 게이머가 게임을 예술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비평가들조차 그것을 제대로 규정 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술하겠지만 비평가들이 게임에 예술의 요소가 존재한다고 판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명확히 하지 않고 유보한 책임이 크다. 예컨대 ‘아트 게임’이라고 분류되는 게임은 국내외의 비평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음에도, 그것을 직접 플레이하는 게이머로부터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특히 <디어 에스더(Dear Esther)>나 <에디스 핀치의 유산(What Remains of Eidth Finch)>과 같은 게임은 연출이나 내러티브적 요소에 집중함으로서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게이머에게 있어서 위의 게임들은 그 자체가 가지는 유희적 측면이 공허했기에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게이머들은 위와 같은 게임을 바라보면서 ‘워킹 시뮬레이터’(Walking Simulator)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물론 비평가와 관객—이 경우에는 게이머가 될 것이다—의 의견이 상충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또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담론을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되레 긍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게임비평에 있어서, 우리는 이 지점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여타 예술과 매체—특히 영화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괴리 자체에 대해서 이미 수없이 논의해왔지만, 게임비평은 그러한 부침을 겪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그저 대중과 비평가 사이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고, 유기하고 있었을 뿐이다. 더 이상 이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현 게임비평에서 나타나는 괴리는 게임 그 자체의 특성과도 연관 지어지며, 우리가 게임에 대한 비평을 하고자 한다면—혹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필연적으로 짚고 넘어가야만 할 사안이다.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지점은 게임비평이 대중과 유리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비평가들은 게임으로부터 예술의 요소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언뜻 성공한 것처럼 보이자, 이를 기반으로 비평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대중과 비평가가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달라지면서 괴리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대중은 이 시점에서 게임을 여전히 예술로 대하고 있지 않았으며, 비평가들은 게임을 비평한답시고 기존 예술의 틀을 경유하여 비평하고 있었다. 이는 곧바로 대중에게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서 기존 예술의 비평론, 특히 영화 비평론을 경유한 비평이 게임의 경험과 불일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게임에 대한 비평이 영화 비평과 유사해질수록 위와 같은 경향이 심해졌다. 즉, 실상 게임과 영화가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평가가 매체라는 지점에 천착하면서 영화의 비평론을 게임비평에 유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영화에서 나타나는 ‘몰입’과 게임에서 나타나는 ‘몰입’의 양상은 문학이나 무용에서도 그러하듯이 그 예술 형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게임비평가들은 이것에 대한 많은 분석과 논의 없이 그것을 곧바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앞서 언급한 ‘몰입’에 대한 분석만으로 게임 자체의 특성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애초에 ‘몰입’은 부차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까닭에 곧바로 두 번째 논점을 얘기하는 것이 가능해지며, 비로소 게임의 본질적 특성에 조금이나마 근접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게임’에 있어서 위와 같은 몰입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많은 게임 연구자, 그리고 비평가에게 있어서 주요한 질문이 될 텐데,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게임의 특성을 규정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 이에 대해 조야하게나마 대답한다면, 그 특성은 아마 ‘감각 가능성’, ‘규칙성’, ‘유희성’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감각 가능성’은 게임이 가상으로서 우리의 감각을 매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가상 속 게임의 세계와 나를 현실 세계의 ‘나’와 연결 짓게끔 하며, 결과적으로 그 ‘세계’와 플레이하는 게이머, 더 나아가서 현실 세계와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규칙성’은 게임의 언어이자 문법으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게임이 성립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 게임의 규칙이 느슨하거나 혹은 없다고 여겨지는 경우에까지 성립 가능한데, 게임을 경험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의 규칙을 찾아내거나 게임 내에서 규칙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이를 샌드박스나 오픈 월드 장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자연스레 자신만의 규칙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규칙이 이미 단단하게 성립된 경우에도 유효하다.
유희성은 위의 두 개념과는 달리 좀 더 게임의 본질에 가까운데, 그 까닭은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특성이 단일한 개념으로 바라볼 때는 게임과 그다지 깊은 연관이 없어 보이고, 심지어는 게임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 이들을 매개함으로써 게임이 지닌 특성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포섭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간명히 말하자면 유희성은 우리가 게임으로부터 어떻게 만족감을 느끼는지에 대해 관여한다. 이는 게임 내 장르와는 무관하게 작동하며, 오히려 게이머와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그러므로 게임을 플레이하며 느껴지는 만족감은 필연적으로 유희성과 위에서 언급한 두 특징의 각기 다른 결합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우리가 근 몇 년간 자주 사용한 ‘창발성’의 개념은 ‘규칙성’과 ‘유희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레벨 디자인적 요소로부터 얻는 만족감은 ‘감각 가능성’과 ‘유희성’의 결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게임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까닭에 다른 두 특징이 부각되어 있더라도, 유희성이 부재할 때 우리는 게임으로부터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러한 논의가 전부 진부하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미 위의 개념들이 게임에 관한 논의에 있어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규칙성’의 경우 게임제네레이션의 이정엽이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에서 미구엘 시가트를 경유하여 논의되었으며, ‘유희성’은 비록 그것이 게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지만, 요한 하위징아, 더 나아가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쟁점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는 게임에 대한 한 가지 주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주석을 하나 달 수 있다면, 위의 특성들, 심지어는 유희성조차 단일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희성’이 놓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살펴볼 만한 지점은 게임이 그 자체의 토대를 아직 마련하지 못한 상태—위에서 언급한 특성은 본 글에서 아직 완전히 규명되었다 할 수 없으므로—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예술, 특히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 혹은 게임 아트 장르가 게임을 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게임의 방법론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와파 빌랄의 2008년도 작품인 <가상의 지하드(Virtual Jihadi)>는 알 카에다에서 직접 제작한 게임에 수정을 가하여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아랍 문화권에 대한 혐오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하였으며, 이안 쳉의 <BOB(Bag of Beliefs)> 같은 경우 작품 구성에 비디오게임 엔진을 사용하며, 게임의 방법론을 이용하고 있다. 물론 위의 두 작품에 대한 비평은 본 글의 논점에서 벗어나기에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게임으로서 작동하지 않으며 그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들은 그것들이 이룬 성과를 차치하더라도, 게임을 소재로 삼은 예술의 일종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 우리는 더더욱 게임을 이루고 있는 토대와 그 본질적 특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실 현 게임비평—혹은 비평계 전반에 감도는 분위기—은 비평가들에게 주어진 유예를 재촉하고 있기에 오히려 우리는 서둘러 그 선고를 어떻게 마주할지 준비해야만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게임제네레이션 1호에 실린 한송희의 글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미학적, 학문적 탐구로부터 비롯되는 현실과의 유리를 경계하면서도, 게임에 있어서는 그러한 과정이 미진했기에 이제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게임의 본질적 특성을 제대로 규명할 것이며, 이를 통해 기존 게임비평론이 단순히 무가치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그저 폐기해야만 할 것은 아니었다고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주어진 선고를 납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게임에서 문화, 이데올로기, 변혁을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한 게임이 정말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면, 이는 다른 무엇도 아닌 게임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라는 걸 확인하게 될 테다. 그렇기에 본 글은 게임에 대한 비평이자, ‘게임비평’에 대한 비평이며, 하나의 소망을 담은 ‘선언’이다.
참고문헌
이정엽,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게임제너레이션, 2021년 8월 6일, https://www.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match=id:6
강신규, 「한국 게임비평의 궤적과 방향」, 게임제너레이션, 2021년 8월 9일, https://www.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28
한송희,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게임제너레이션, 2021년 8월 9일, https://www.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22
이경혁, 「<세계건설, 게임 방법론의 새로운 예술적 적용」, 게임제너레이션, 2022년 6월 9일, https://www.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130
22.07.
부족한 시기에 썼던 부족한 글.
지금과는 생각의 차이가 많이 보인다.
더 나아지길 바라며 아카이빙을 위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