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판타지 16>과 ‘영화-게임’의 문제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올해로 35주년을 맞은 대규모 프랜차이즈 게임이다. 현재 정규 시리즈는 16까지 발매되었으며, 외전 및 타 미디어 매체로 전개해 나간 것까지 포함한다면 셀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본 게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이름 정도는 한 번쯤 들어봤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게임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RPG 장르의 유명한 게임이라는 것 정도까지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오랜 기간 동안 제작 되어왔고, 그렇기에 두터운 팬 층을 가지고 있을 법한 RPG 장르의 게임이라는 사실에 어렵지않게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파이널 판타지 16(FINAL FANTASY ⅩⅥ)>이 발매되면서 발생했다. 의견이 갈리긴 했지만 많은 이들이 본 게임을 대체로 좋은 게임이라고 평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침체되어 가던 시리즈를 되살릴 부활의 신호탄으로 여기는 사람들까지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러한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파이널 판타지 16>은 내게 비디오 게임이 진정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점을 던지는 게임이었다. 그렇기에 본 글을 통해 <파이널 판타지 16>이 어째서 문제적인 게임인지, 더 나아가 현대 비디오 게임들이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파악해 보고자 한다.
<파이널 판타지 16>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어째서 ‘게임’을 하는지에 관해 생각해야만 한다. 좀 더 명료하게 질문을 바꿔보자면, 우리는 어째서 게임이라는 형태의 유희를 즐기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C. 티.응우옌이 자신의 저서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주장한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게이머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게임을 통해 어떠한 성취를 얻고자 하는 게이머이며, 또 다른 부류는 게임 내에 설정된 고투를 경험하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게이머이다. 전자의 경우 그 성취가 게임의 승리 그 자체이거나, 게임 외적인 성취-예컨대 상금과 같은 것-와 연관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게임 자체를 즐기기보단 그것을 수단으로써 활용하고 이를 위해 몰입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그들은 게임 내에서 레벨 디자이너가 설정한 고투나 스스로 설정한 고투를 즐기고 뛰어넘기 위해 그 게임에 몰입한다. 이것은 후자의 게이머들에게 있어 중요한 과정인데, 그 까닭은 게임 내의 규칙이 아무리 바보 같은 것이더라도, 어떤 게임에서 고투를 진정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그 규칙에 완전히 몰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규칙은 그 게임이 어떠한 장르인가에 따라 개별적으로 달라질 수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그것은 게이머의 행위를 규정한다. 즉, 게임은 플레이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할 수 없는지를 제한한 뒤 그들이 해내야 하는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위해 이에 따라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통해 무언가 경험하기를 바라면서 그것에 몰입한다. 이는 성취형 플레이어와 고투형 플레이어에 있어 모두 동일하다. 그들은 게임을 통해 승리 혹은 성취라는 경험을 얻기를 바라거나, 게임 내에서 고투와 그것을 뛰어넘는 경험, 혹은 단순히 즐거움을 얻기 위해 게임의 지시에 따른다. 이를 위해 게임은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해 왔다. 가장 단순한 게임 중 하나인 <지뢰 찾기(Minesweeper)>를 예시로 생각해 보자.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 게임을 처음 실행했을 때 가운데의 노란 스마일리에 주목하게 되고, 그 옆에 놓여있는 두 가지의 숫자, 그리고 약간 볼록 튀어나와 있는 회색 타일을 마주하게 된다. 플레이어는 곧 그중 스마일리와 타일들을 마우스로 클릭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둘 중 하나를 클릭하게 되는데 스마일리를 클릭할 경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지만, 타일을 클릭하게 되면 곧 무수한, 그리고 다양한 숫자들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플레이어가 스마일리를 다시 한번 누른다면 그것이 게임을 초기화하는 버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마구잡이로 아무 타일을 누를 경우 지뢰가 터지고, 죽은 스마일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제야 플레이어는 본 게임에서 주어진 숫자들을 통해-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는 것은 다음 문제이다-지뢰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스마일리가 선글라스를 쓰고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지뢰 찾기>는 단순한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게임에 관해 핵심적인 지점을 시사해 준다. 바로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대부분-우연한 확률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 없이 플레이하거나, 뛰어난 직관을 통해 단번에 게임의 규칙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필연적으로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실패와 이에 따른 페널티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저니(Journey)>와 같은 게임을 싱글 플레이로 진행할 경우 길을 조금 헤맬 수는 있고 이에 따르는 좌절감을 느낄 수는 있으나,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는 그저 시간을 조금 더 쓰면 해결되는 문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크 소울(Dark Souls)>과 같은 게임은 플레이어가 사망할 경우, 꽤나 먼 거리에 있는 체크포인트에서부터 시작하게 되며 사망 지점까지 돌아가지 않는 이상 그간 얻은 재화를 잃게 된다. 이러한 이유, 즉 어떤 페널티를 겪을지 알 수 없다는 불확정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그저 게임에 불과할지라도 실패를 경험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특히 게임을 처음 접한 사람일수록 그렇다. 그렇기에 게임 제작자는 이를 경감시키고자 다양한 방법론들을 사용한다.
실패에 대한 부담을 감소시키기 위한 쉬운 방법 두 가지는 난이도 조절 옵션을 제공하는 것과 ‘컷신(Cut scene)’ 혹은 ‘이벤트 신(Event scene)’을 사용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오래전부터 대다수의 게임에서 애용되는 것으로 게임을 간단히 세 가지의 난이도인 쉬움(Easy), 노멀(Normal), 어려움(Hard)로 나누는 것이다. 제작자는 이를 좀 더 세분화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더 많은 고투를 원하는 플레이어를 위해 어려움보다 좀 더 높은 난이도를 제공한다.
후자의 경우 전자와 달리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예컨대 플레이어가 마주해야 하는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기도 하며, 게임 내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되거나 튜토리얼을 보여주는 식이다. 하지만 이를 영리하고 폭력적으로 사용할 경우 위의 두 가지 역할을 함과 동시에 플레이어의 실패를 방지할 수 있다. 바로 플레이어가 개입할 수 있는 순간 자체를 통제하는 것이다. 어려워 보이는 전투 혹은 상황을 컷신을 통해 해결하게 될 경우, 플레이어의 피로도를 줄임과 동시에 플레이어의 실패를 미연에 예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것에 QTE(Quick Time Event)를 더할 경우 위와 같은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QTE가 사용되는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조작은 버튼 몇 개를 순서대로 누르거나, 연타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다는 착각을 플레이어에게 안겨줌과 동시에 실패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물론 QTE에도 실패는 존재한다. 하지만 QTE에서의 실패와 게임에서 일반적으로 겪는 실패에는 ‘질’의 차이가 존재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며 겪는 실패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좌절감을 줌과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거나 그대로 주저앉게끔 만든다. 하지만 QTE를 실패하는 경우, 그것은 ‘그저 그런 일’로 격하된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승리는 어떠한 좌절감도, 의지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일종의 현상에 가깝다. 이제 플레이어는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제 이 순간에 게임은 영화가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폭력을 휘두른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에 있어서 관객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대체로 객석에 앉은 채 감독이 생산한 작품을 가만히 앉아서 보거나, 극장을 나가 영화를 보는 것을 중단하는 것밖에 없다. 영화에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지점은 극장에서 그것을 관람할 경우, 보통 혼자 관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집에서 혼자 플레이하는 비디오 게임과 달리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집단적인 경험이며, 그것은 영화 관람 자체의 경험과는 별개의 경험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게임의 순간 속에서 컷신이 보여질 때, 기존의 행위 중심의 플레이는 정지되고 플레이어는 관람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때 그곳엔 행위성이 거세된 ‘나’와 게임만이 덩그러니 남겨진다. 게임이 영화로부터 선취했던 지점은 이제 사라진다. 즉, 그것은 더 이상 게임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영화의 문법을 전유한다.
<파이널 판타지 16>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를 품고 시작한다. 본 게임을 액션 RPG로 정의한 이상, 플레이어들은 기존의 그 장르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것들과 그 이상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물론 플레이어가 처음에 가진 기대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도중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시작하는 순간에 있어서는 동일할 것이다. 심지어 <파이널 판타지 16>의 시작은 이러한 플레이어들의 기대치를 높이기까지 한다. 기본적인 시스템에 대한 튜토리얼은 차치하더라도, 초반 시퀀스에서 드러나는 비장함과 장대함은 그것을 직접 조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플레이어의 기대감으로 직결된다.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플레이어는 앞서 보았던 거대한 전투를 직접 조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더불어 어떠한 체험을 통해 그것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을 하며 게임을 플레이하게 된다. 그러나 본 게임을 시작했을 때, 플레이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서사를 위한 장치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것뿐이다. 이를 ‘장치’라고 표현한 까닭은 서사적 측면과 게임의 플레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실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치가 일종의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효과적이었겠지만, <파이널 판타지 16>은 그런 방식으로 기획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인내심이 없고 서사에 관심이 없는 플레이어라면 이 단계에서 게임을 관둘 것이다. 게임을 많이 접한 노련한 플레이어들의 경우 이러한 단점들을 애써 무시한 채, 본 게임의 장점으로 피력되는 듯한-앞선 튜토리얼에서 보여준 것들-것을 경험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 순간을 앞에 마주할 때,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단점이 쏟아져 나온다.
본 게임에서 가장 클라이맥스가 돼야 했었을 소환수 전투는 그저 기존 컷신보다 더 동적일 뿐이고, 위장된 플레이 경험을 위한 QTE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의미하게 버튼을 연타하는 것의 연속일 뿐이다. 그 뒤의 전투는 다시 컷신으로 연결되고, 잠깐의 무의미한 조작을 거친 뒤에 다시 QTE로 돌아온다. 그렇게 플레이어가 첫 번째 소환수 전투를 끝낸 뒤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소환수 전투가 이렇게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끔찍한 미래에 대한 것뿐이다. 가장 기대를 충족시켜 줘야 했을 파트는 가장 무의미한 파트가 되었고, 이제 <파이널 판타지 16>에서 플레이어는 서사를 관람하기 위한 장치로서 작동할 뿐이다.
이 문제는 <파이널 판타지 16>의 장르가 액션 ‘RPG’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의 약어인 RPG는 장르에 대한 규정 자체가 모호하며 다른 장르와 쉽게 섞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플레이어의 주도적 경험이 중요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본 게임의 1회차 플레이에서 위와 같은 RPG적 요소를 찾기는 어렵다. 즉, <파이널 판타지 16>은 그러한 경험을 모두 표백시키고, 이야기와 화려한 연출을 그것에 덧칠하고 있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존재하지 않는 게임은 공허하다. RPG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이러한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RPG라는 장르 내에서 항상 다양한 시도를 해왔으며, 이 시도는 그 일환 중 하나일 뿐이라고. 물론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외전과 수많은 시리즈를 통해 많은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오히려 다양한 시도라는 지점만으로는 더 이상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없다. 본 게임에서 나타난 것들은 이미 기존 시리즈에서 성취된 것들일 뿐이다.
<파이널 판타지 16>에서 연인을 지키고, 동료를 지키고, 세상을 지켜 끝내 신과 결별하고자 하는 클라이브는 결국 한 서사극의 주인공으로 남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으며,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는 탈각되어 관람자로 남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게임에서 얻고자 하는 경험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