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뛰어넘기’

: 세계와 불화하며 살아가기

by 관단

게임[1]과 규칙, 그리고 제약


많은 이들이 여전히 게임으로부터 다양한 의미를 도출해 내고자 한다. 하지만 게임의 외연은 기본적으로 놀이이고, 유희이다. 즉, 우리가 게임을 다룰 때의 시작 지점이 그곳인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노르베르트 볼츠가 언급하듯이, “가장 원초적인 놀이일지라도 이는 자유시간을 여유로, 즉 삶의 즐거움으로 변환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여기에서 놀이는 자기 자신 이상의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된다......놀이는 비생산적이고 순수한 낭비이며, 항상 원점에서 시작한다.”[1] 놀이에는 언제나 규칙이 있으며, 그것을 지키지 않는 순간 놀이의 세계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놀이는-여전히 이와 같은 관점에서 놀이 혹은 게임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지만-완전히 자유로운 세계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그 공간은 현실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이며, 이 새로운 세계에는 그곳만의 규칙이 있다. 그렇기에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그것에 순응하고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의 형태적 특성을 “‘일상’ 생활의 바깥에서 벌어지고, ‘진지하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으며, 독립되어 있는 자유로운 행위이나, 놀이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몰두하도록 만”[2]들며 “물질적 이해와는 상관없는 행위이고 아무런 이득도 제공하지 않는”[3]것이라고 규정한다. 놀이에 대한 몰입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비로소 행위자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행위자를 외부 세계와 단절시키는 것이 바로 ‘규칙’이다. 그러나 규칙은 때때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놀이 그 자체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각하게 될 경우, 놀이의 참여자가

세계의 몰입으로부터 빠져나와 그것이 놀이라는 것 또한 인지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놀이는 규칙을 교묘하게 숨겨야 하면서도 그 규칙을 참여자에게 인지시켜야 한다는 아이러니를 지닌다. 이는 곧 규칙이 ‘제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위와 같은 이유로 게임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에는 ‘몰입’과 ‘규칙’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규칙에 대해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보기 위해 ‘창발성’(Emergence) 개념을 확인해 보자. ‘창발’이라는 개념의 사전적 정의는 ‘남이 모르거나 하지 아니한 것을 처음으로 또는 새롭게 밝혀내거나 이루는 일’을 의미한다. 하지만 게임에 있어서는 예스퍼 율[1]이 정의하듯이 ‘다양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규칙을 조합하는 것’[2]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전적 정의와 예스퍼 율의 정의를 합쳐본다면, ‘창발성’은 곧 게임의 몰입을 가능케 하는 규칙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창발성도 여전히 앞서 말한 ‘규칙’의 아이러니에 얽매여 있다. 창발적 플레이는 규칙을 분명하게 인지해야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플레이어는 언젠가 제약으로 인식될 여지가 있는 규칙에서 탈주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예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순간, 탈주를 추동하는 것은 바로 게임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움직임’이다. 캐릭터에 대한 조작 자체가 필요하지 않거나, 자동으로 모든 것이 진행되는 몇몇 장르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비디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진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키보드, 마우스 혹은 게임 패드 등을 통해 조작되며, 대체로 실제 생활에서의 인간 혹은 동물을 재현하고 모방하고 있다.


그림1.jpg <바퀴벌레 포커(Cockroach Poker Royal)>의 규칙 설명서


<메트로이드 드레드(Metroid Dread)>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플레이어는 항상 게임 내 규칙을 준수하는 범주에서 움직여야만 한다. 즉, 플레이어는 생활 세계에서처럼 본인이 움직이는 방식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컨대, <헤일로(Halo)>와 같은 게임에서 전투를 위한 움직임은 가능하지만, 아무 벽에 기대거나 짝다리를 짚고 싶을 때 짚는 것은 안 되는 식이다. 이 말은 곧 대부분의 게임은 레벨 디자이너가 설계한 큰 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움직임만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플랫포머(Platformer) 장르에서는 낭떠러지나 가시와 같은 함정을 뛰어넘기 위한 점프가 주된 움직임이 되며, MMORPG와 같은 장르에서는 퀘스트 해결과 전투를 위한 이동 그 자체가 주된 움직임이다. 즉, 게임의 성격-장르, 목적 등-에 따라서 “플레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동의 자유와 그 이동을 보장하는 체계적으로 조직된 형식이 요구”[1]되며, 이를 위해 이동 방식 자체에 규칙을 설정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규칙은 생활 세계의 제약과는 다르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같이 이러한 제약들을 탐색하는 것”[2]이고 삶은 일상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의 규칙들은 “일상의 한곳에서 도달할 수 있는 즐거움과 긴장의 황홀감이라는 예외적 상태로 우리를 옮겨 놓”[3]고 즐거움을 응축시키기 위해 설계된다. 또한 게임의 규칙은 기존 보드게임 혹은 친구들끼리 하는 놀이의 규칙과도 구분될 필요가 있다. 후자의 경우, 명시적인 규칙을 학습하거나 설정한 뒤 놀이하거나, 유연하게 규칙을 바꾸어나갈 수 있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바퀴벌레 포커 로얄(Cockroach Poker Royal)>과 같은 보드게임은 시작하기 전에 모두가 규칙을 습득해야만 원활한 플레이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 예를 들어 [그림 2]의 <메트로이드 드레드(Metoid Dread)>와 같은 게임에서는 우선 이동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만,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움직이며-게임 도중의 간략한 설명을 제외하고-게임의 규칙이 무엇인지 익혀나가는 수밖에 없다.



세계와 불화하기

<파이널 판타지 14(Final Fantasy 14)>에서 플레이어가 이동하면서 점프하는 장면.



하지만 즐거움을 위해 설계된 규칙에서조차 플레이어들은 탈주하고자 한다. <셀레스트(Celeste)>와 같은 게임은 적절한 이동과 점프를 통해 장애물을 극복하고 스테이지의 끝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인 플랫포머 장르의 게임이지만, 플레이어들은 제자리에서 계속해서 점프한다든지, 수시로 대시 버튼을 누른다. 마찬가지로 [그림 1]의 <파이널 판타지 14(Final Fantasy)>와 같은 MMORPG 장르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그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든지, 이유 없이 걸어 다니며 스킬을 캐스팅하기도 한다. 이는 스피드런에서처럼 게임을 빨리 클리어하기 위해 사용하는 움직임과는 다르다. 스피드런은 게임을 최단 시간으로 클리어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이동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으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은 게임의 상태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잠깐 게임의 세계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로 돌아와 보자. 실제로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위와 같은 움직임을 보일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즉, 우리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몇 바퀴 돈 뒤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이 길을 걸어가지도 않고, 누군가와 대화 도중 갑작스럽게 제자리에서 점프를 여러 번 하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는 글을 쓰거나 이야기하면서 손톱을 뜯는다든지, 다리를 떠는 등의 행위를 한다. 이러한 행위는 대부분 습관을 통해 형성되거나, 불안감의 표출을 위해 수면위로 드러나곤 한다.


이제 하나의 가정이 요구된다. 만일 현실 세계와 동일한 움직임과 감각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게임이 존재한다면 플레이어들은 위와 같은 움직임을 보일까? 아마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 그와 같은 행위를 멈출 것이다. 감각이 현실과 동일하게 재현된다면 플레이어들은 금세 피로감을 느끼게 되며, 일상생활의 제약을 다시금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애당초 감각이 주는 즐거움은 게임이 추구하는 즐거움과는 다르다. 게임의 플레이는 감각 그 자체의 재현을 위한 것이 아닌 보조를 위한 것이며, 그것에 의한 “결과가 아닌 과정”[1]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감각의 재현이 기존 게임보다 본격화된 VR 게임의 경우, 제약이 규칙보다 단적으로 두드러진다. 물론 VR 게임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VR 기기의 무게가 주는 불편함, 감각의 재현과 몰입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기술적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불일치감 등이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제약을 상기시킨다. 또한 현재 기기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플레이어는 게임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순간 두 세계-게임과 현실-가 가진 제약의 차이를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순간들이 계속해서 축적되다 보면 게임을 더 이상 즐거운 ‘유희’로서 성립하지 못한다. 다시금 플레이어들이 게임 속 세계로부터 탈주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뛰어넘기’



<슈퍼 마리오 64(Super Mario 64)>


하지만 여전히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 세계 속에서 유희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게임 속 플레이어의 무의미한 행위들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불안감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영화를 지각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산(Zerstreuung)’ 개념을 언급한다. 예를 들어 “캔버스는 보는 사람을 관조의 세계로 초대하[1]”지만 “영화의 장면은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버”[2]린다. 즉, 회화와 달리 영화에서는 침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영화 속 정신분산의 경험은 현실 세계에서 현대인의 지각 경험과 맞닿아 있고, 그와 같은 지각 방식을 담아내고 훈련하게 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벤야민은 “영화에서의 지각적 경험이 분주한 대도시에서의 그것과 유사하다고”[3] 설명한다. 영화는 현실 세계에서 분주해진 지각 경험을 훈련하게끔 하는 매체인 것이다.


게임은 영화보다도 더한 상황을 플레이어에게 들이민다.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하며, 그것에 몰입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타나는 일시성-예컨대 계속해서 변화하는 환경들 같은 것-과 마주해야 한다. 몰입과 탈주를 반복하는 플레이어는 이제 그 세계 자체가 아이러니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플레이하기를 멈추지 않고, 그 세계를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게임은 여전히 삶의 즐거움을 위한 연습장이자 훈련장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여전히 게임으로부터 탈주할 가능성을 담지한 채, 그 세계와 불화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들은 게임 내에서 움직임을 통해 첫발을 내디딘다. “우연한 계기에서 게임 유저는 이전까지 게임이 추구해 왔던 목적과 기능성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체감”[4]하게끔 해주는 창발적 플레이와는 달리 이들은 불화를 경험하면서도 그 세계에 몸을 맞추어 유희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삶에서 부조리와 아이러니를 겪는 순간에서 그러하듯이 말이다. 즉,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를 수용하는 방식 자체가 ‘불화’인 것이며, 영화가 태동하던 시기에 그것이 현실의 변화된 지각 방식을 훈련하게 시켜주었듯이 게임은 삶에서의 불화를 연습할 수 있게끔 해준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게임의 플레이어는 의미와 무의미, 혹은 아이러니와 부조리로 가득 찬 세계 사이의 심연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1] 본 글에서 ‘게임’은 편의상 비디오 게임을 의미한다. 이와 구분하기 위하여 기존의 게임들, 즉 보드게임, 도박, 혹은 술래잡기, 숨바꼭질 같은 게임들은 놀이로 표기한다. 또한 비디오 게임은 큰 틀에서 놀이에 속해있기에, 놀이와 공유하는 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2] 노르베르트 볼츠, 『놀이하는 인간』, 문예출판사, 윤종석 외 2명 옮김, p. 52

[3] 요한 하위징아, 『호모루덴스』,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8, p. 53.

[4] 요한 하위징아, 위의 책, p. 53.

[5] 국내 번역서에는 제스퍼 주울로 표기되어 있으나, 본 글에서는 원어 발음에 가까운 예스퍼 율이라는 표기를 따른다.

[6] 예스퍼 율, 『하프 리얼』, 장성진 옮김, 비즈앤비즈, 美學2014, p. 83.

[7] 브라이언 업튼, 『플레이의 미학』, 김동훈 옮김, 에이콘, 2019, p. 42.

[8] 브라이언 업튼, 위의 책, p. 42.

[9] 노르베르트 볼츠, 앞의 책, p. 26.

[10] 브라이언 업튼, 앞의 책, p. 45.

[11] 발터 벤야민, 『벤야민 선집 제2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p. 89

[12] 발터 벤야민, 위의 책, p. 89

[13] 강재연, 「탈주체적 경험으로서 정신분산」, 『美學』, Vol.90, No. 2, 한국미학회, 2024, p. 3

[14] 장강현, 「디지털 게임에서 유저의 창발적 경험에 관한 미학적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석사논문, 2022, 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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