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라는 암실

‘*설명 중*-그럼 죽어’의 동치 가능성

by 관단

‘*설명 중*’-그럼 죽어’의 구조


정말 지루하고 현학적인 설명보다 죽여버리는 것이 ‘좋은 답변’일까?

모든 논쟁이 무의미해지는 듯하고, 지난한 논쟁의 끝이 보일 때쯤 다시금 새로운 논쟁이 반복될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이때 우리는 지루하고 장황한 설명 대신 모든 것을 부수고 죽여 해결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곤 한다. 이런 정서를 공유하는 이들이 많았는지, 어느 순간 인터넷 곳곳에서 ‘그럼 죽어’라는 밈이 퍼졌다. 이 밈은 상대를 설득하려는 설명을 지루하고 현학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설득에 실패하면 나의 세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전제를 덧붙여 그것을 ‘나쁜 답변’으로 배치한다. 또한 논쟁의 대상을 간단히 제거해 나의 세계를 보존하는 선택지는 상대를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좋은 답변’으로 제시된다. 두 답변은 게임의 플레이어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내러티브 중심 게임의 경우, 내러티브와 플레이가 구조적으로 잘 결합 돼 있더라도 그것이 플레이어가 생각하는 행위를 제한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럴 때일수록 플레이어는 ‘*설명 중*’의 상황을 지겨운 것이자 ‘나쁜 답변’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따라서 어떠한 개입 없이 플레이어가 온전히 자신만의 플레이를 즐길 수 있는 상황은 자유롭게 유희하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그럼 죽어’를 따르는 게임은 ‘좋은 답변’으로 치환된다.


위의 도식화된 대립에 따르게 될 경우,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그럼 죽어’의 논리를 따르는 대표적인 게임이라 볼 수 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서 ‘헌터’는 시리즈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마을에 도착해, 어떠한 이유로 몬스터들이 마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촌장의 의뢰로 그들을 토벌한다. 그리고 끝내 그 원인-대체로 원래 그 지역에 살지 않던 몬스터가 특정 이유로 인해 그곳에 정착하여 다른 몬스터들이 도망가는 과정에서 마을에 침입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게임에서 새로운 퀘스트를 여는 것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플레이어인 헌터는 새로운 외형과 패턴을 가진 강력한 적에 맞서는 것으로부터 재미를 느낀다. 즉, <몬스터 헌터>의 세계 속에서 플레이어는 말 그대로 ‘그럼 죽어’를 끊임없이 수행하고, 게임 또한 이를 유도한다. 하지만 AAA급 게임들이 역동적인 환경과 생태계,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강렬한 내러티브를 약속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최신작인 <몬스터 헌터 와일즈>(이하 와일즈) 또한 이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와일즈>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실제 플레이는 기존의 <몬스터 헌터 시리즈>와 별 다른 바 없이 결국 끊임없이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으로 수렴했다. 이는 결국 케케묵은 논쟁인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nance, 이하 LND)[1]를 호출한다. 게임의 플레이가 유도하는 행위와 내러티브가 말하는 가치가 불화할 때 플레이어는 부조화를 느낀다고 주장한 LND는 여전히 유효한 듯이 <와일즈>에도 동일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LND 자체는 실제로 많은 게임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같지만, 이에 대해 논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LND를 게임이라는 매체의 근본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착시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LND 자체가 아니라 LND 이전과 이후의 게임, 그리고 그 플레이어다.


이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와일즈>의 플레이어는 그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럼 죽어’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는가? 물론 이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와일즈>가 훌륭한 게임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와일즈>는 뛰어난 게임이라기보단, 되레 썩 좋지 않은 게임에 속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단초를 보여줄 수 있다.



행위자 네트워크로서의 게임


실마리를 따라가기 위해선 게임을 행위자 네트워크로서 생각해 보는 것이 조금 도움이 될 듯하다. 브루노 라투르나 그레이엄 하먼을 위시한 사회학자, 철학자 또는 과학기술학자에 의해 다뤄진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은 인간·비인간에 대한 주체/객체 구분을 미뤄둔 후, “세계가 그러한 존재자들이 이루고 있는 연결망의 형태로 존재”[2]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연결망(네트워크)은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비인간)행위자 모두의 얽힘으로써 서로를 끌어들이고자 한다. 이 끌어들임의 과정은 ‘번역’으로 이뤄지는데 번역은 “한 행위자의 이해나 의도를 다른 행위자의 언어로(즉 다른 행위자의 이해나 의도에 맞게) 치환하기 위해 프레임을 만드는 행위”[3]이다. 즉, 서로를 같게 만드는 동시에 차이를 생성하는 네트워크의 건설 과정이 곧 번역이다. 다만 이러한 번역의 과정에서 손실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차이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온전히 번역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때 행위자는 그 관계 속에서 부분적으로만 드러난다. 하지만 번역되지 않은 잔여들도 여전히 그 관계망에 존재한다.


또한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를 자신의 네트워크에 편입시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의무 통과점(Obligatory Passage Point, 이하 OPP,)’을 세우게 된다. 이때 의무 통과점은 여러 가지 요소를 그 관문을 향해 정렬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곳을 통과할 때 행위자들은 서로의 부분을 맞닿게 하여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행위자들은 접하는 부분만큼의 의미를 서로 부여하게 된다. 즉, 행위자들이 맞닿지 않는 부분-등을 맞대고 있을 때 서로의 앞을 알 수 없는 것처럼-은 서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OPP를 통과하지 않는 부분은 번역되지 않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네트워크에 드러나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위와 같은 네트워크의 건설 과정이 끊임없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별개로 네트워크는 일시적 안정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안정된 네트워크는 암실화(Blackboxing)됐다고 칭하는데, 이 네트워크는 구체적인 투입과 산출 과정의 이해 없이 작동하는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행위자는 이를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내부 공학이 “완전히 불가사의한 수수께끼”[4]일지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그레이엄 하먼의 말처럼, 암실화 된 네트워크는 그 안이 행위자들로 가득 차 있더라도 그것이 열리기 전까지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그 필요 또한 느끼지 못한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한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미니언은 그저 때리면 돈이 나오는 도구에 불과하다

게임은 위와 같이 암실화 된 네트워크와 유사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임이라는 암실이 의도적으로 설계됐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유희라는 OPP를 통과해 기꺼이 게임에 입장하게 되며 블랙박스로서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 그곳엔 여전히 UI, NPC, 장비, 퀘스트부터 게임의 레벨 디자인, 규칙들, 프로그래밍된 코드, 내러티브와 같은 행위자가 산재해 있고 서로 연결돼 있지만, 플레이어는 이를 행위자라기보단 플레이어가 도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암실의 플레이어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자신에게 달린 실들의 정체를 모른 채 춤춘다.



밝혀지는 암실


암실화 된 게임의 네트워크 속에서도 행위자들-플레이어를 포함해서-은 여전히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있다. 따라서 암실 속에서도 행위성의 중심은 이동될 수 있으며 다양한 의무 통과점을 통해 재정렬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행위성의 중심이 이동할 때 그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칠 경우, 암실이 열리는 일도 발생한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 암실로서 설계된 게임은 사실 언젠가 열릴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게임이라는 매체 특성상 이는 흔한 일이다. 언젠가-보통은 그것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플레이어가 게임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됐을 때, 혹은 게임에서 제시하는 목표가 사라질 때 결국 암실은 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는 급작스럽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열린다. 이 과정은 플레이어가 암실 속에서 자신이 더듬거리고 도구로 사용하던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과정이자 플레이어가 게임 속의 다른 행위자와 그것이 접하고 있던 지점들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앞선 열림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잠시 <와일즈>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게임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의 경우, 플레이어는 주인공인 ‘크레토스’로 플레이하며 게임의 내러티브를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잠시 주요 내러티브로부터 벗어나 사이드 퀘스트를 진행할 수도 있고, 필드 곳곳에 나타나는 괴물들과 싸우며 전투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이때 플레이어는 어렴풋이 ‘설계된 네트워크로서의 게임’이 어떤 형식을 따르는지 깨닫게 된다. 여전히 내러티브가 남아있고, 그것을 향해 가야만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렇기에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의 내러티브는 OPP로서 게임의 내러티브가 종료되는 그 순간까지 유지된다. 이와 더불어 내러티브가 종료된 뒤 플레이어는 그 세계에 계속 남아 또 다른 플레이를 시도할 수도 있으며, 메인 메뉴에 새롭게 추가된 새 게임+ 항목을 통해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명순응으로서 행위성의 중심이 플레이어에게 천천히 이동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암실이 열리더라도 어느 정도 충격에 대비할 수 있다.


<와일즈>에서는 일정 시점 이후 게임 내에서 환경과 시간을 간접적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암실이 게임 플레이의 도중, 그것도 갑작스럽게 열린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다시 <몬스터 헌터 시리즈>와 <와일즈>로 돌아가 보자. 글의 초입에서 잠깐 서술했던 것처럼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공통적인 플레이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한 내러티브 속에서 강한 몬스터를 수렵해서 강해지고, 시간 단축을 위해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나간다는 매커니즘 말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강력한 OPP로서 게임 속에 자리 잡았고 이를 통해 플레이어를 게임의 네트워크로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했었다. <와일즈>는 이와 같은 기존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 하지만 <와일즈>는 <몬스터 헌터 월드>부터 시작된 ‘내러티브’라는 OPP를 더 강화하여 전면으로 내세웠으며, 다양한 행위자를 새롭게 설계했다. 이에 따라 퀘스트를 클리어할 때마다 변화하는 기후와 그 기후에 대응하는 몬스터들, 위기 상황을 나타내는 헌터의 체력 표시와 같은 것이 공존과 생태계, 생명을 강조하는 내러티브 OPP와 연결됐다.


문제는 위와 같은 내러티브의 연결이 플레이어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으며, 그것도 갑작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주요 몬스터가 다시 생태계의 일원으로 돌아갔다는 하위 퀘스트의 엔딩 이후이다. 이때 플레이어는 상위 퀘스트를 앞두고서 게임 내에서 얻은 포인트-포인트를 게임 내에서 모으는 것은 간단한 반복을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다-를 통해 시간과 날씨를 간접적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이전까지의 플레이에서 행위성의 중심이 게임의 생태계와 생물들로 정렬됐던 것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심지어 여전히 플레이어가 지나가야 하는 내러티브가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그렇기에 <와일즈>의 내러티브는 OPP로서 의무화됨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에게 충분히 번역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그 역할은 기존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사냥이 떠맡게 된다. 그것도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그렇기에 <와일즈>에서 행위성 중심의 이동은 암실을 연다기보다는, 뜯어내 버린다. 이제 목표를 정렬하는 언어로서 기능하던 내러티브는 정렬 불능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 정렬 불능의 역설


그렇다면 <와일즈>에서 내러티브는 무의미한 것으로 자리잡거나 혹은 소멸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존의 <몬스터 헌터 시리즈>와 달리 <와일즈>가 내러티브를 전면에 드러냈던 까닭에 과격히 부서진 암실 속에서 플레이어는 이전처럼 명쾌한 해답인 ‘그럼 죽어’를 수행하기 어려워진다. 폭발하듯이 터져나간 내러티브가 게임에 플레이어를 계속해서 찌르는 파편으로서 산재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이제 밝혀진 방 안에서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주워야만 할 필요를 느낀다. 물론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이끌어나가던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은 남아있기에 이를 통해 플레이어의 유희는 가능하지만, 파편으로 인해 지금까지 추어왔던 춤을 곧바로 지속할 순 없다. 플레이어가 다시 춤을 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제 유희를 위한 플레이어의 ‘*설명 중*’이다.


플레이어의 행위가 이전의 <와일즈>가 수행하고자 했던 것처럼 ‘번역’이 아닌 ‘설명’인 까닭은 깨져나간 파편이 번역 중 손실로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플레이어는 게임이 스스로를 온전히 번역하지 못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게 되며,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자유로웠던 것처럼 느껴왔던 것이 실제로는 그 손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따라서 손실의 잔여물은 플레이어가 이전까지 게임에서 접하고 있던 면이 아닌, 그 뒷면이다. <와일즈>의 플레이어는 이제 게임에서 발생한 일련의 충돌과 파괴 이전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는 여전히 몬스터를 사냥하고 소재를 통해 강해질 수 있지만 환상통과 같은 위화감, 그리고 불안을 느낀다. 이는 자신이 접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을 거라는 고통이다.


게임의 세계 자체는 견고하기에 사라지진 않지만, 플레이어의 세계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플레이어에게 있어 ‘*설명 중*’은 하나의 선택지로 진지하게 고려될 수밖에 없다. ‘*설명 중*’은 번역의 연장선상이지만, 번역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번역 중 손실을 줄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기약이 없기에 지루하고 현학적일 수 있으며, 온전히 다른 행위자에 가닿을 수 있을지 모르기에 실패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따라서 자칫하면 유희 자체가 무너져 내릴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는 게임이 실패와 넘어설 구조를 함께 준다는 예스퍼 율의 ‘실패의 역설’[5]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정렬 불능의 역설은 보다 메타적인 의미에서의 실패이다. 정렬 불능 상태에서 발생한 실패는 ‘실패의 역설’이 다루는 실패처럼 설계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넘어설 것을 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플레이어는 지속 가능한 유희를 위해 그것을 ‘그럼 죽어’와 같은 선상에 둘 수밖에 없다. 이제 ‘*설명중*’은 ‘그럼 죽어’의 대립항이 아닌, 그저 두 가지 ‘답변’이다. 따라서 ‘정렬 불능의 역설’을 통해 플레이어는 요원해 보였던 ‘*설명중*’과 ‘그럼 죽어’의 동치를 염두에 두게 된다.



끝없이 설명이 필요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엄청나게 복잡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고, 끝없이 부조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다한 설명 대신 간단하고 명쾌한 방법을 욕망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는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열렸어야 하는 문은 참혹하게 부서지고, 그 안에 서 있는 플레이어는 또 다른 암실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와일즈>에서도 이러한 부조리는 반복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생명체인 수호룡 중 알슈베르도가 날뛰는 모습을 보며, 플레이어와 등장인물들은 그것에 의문을 가지고 답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 중 답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고 만난 ‘긴 귀를 가진 분’은 그들이 무엇이 되려 하는진 나도 알 수 없다며, 스스로 답을 찾을 것을 권유한다. 물론 내러티브를 통해 플레이어에게 그 답은 제시되지만 그것은 죽여서 해결한다는, 다소 이해되지 않는 해답이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플레이어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인식하게끔 하는 계기이자 게임과 더불어 게임의 바깥, 그리고 그 사이 잔여를 사유하고 또 다른 해답을 찾아 나서게 하는 충격이다. 이때가 돼서야 <와일즈>의 야생은 비로소 우리가 살아 나가고 있는 바로 그 야생과 맞닿는다.











[1] Hocking, C. (2007, October 7). Ludonarrative Dissonance in Bioshock, https://clicknothing.typepad.com/click_nothing/2007/10/ludonarrative-d.html

[2] 최건, 「게임의 난이도 스케일링에서 비-관계적 요소의 의의에 관한 정성적 연구: <디아블로 4>를 중심으로」, 『한국게임학회』, 24권 1호, (2024), p.74,

[3] 브루노 라투르 외, 『인간·사물·동맹-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테크노사이언스』, 홍성욱 옮김(이음 2010), p.25.

[4] 그레이엄 하먼, 『네트워크의 군주-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철학』, 김효진 옮김(갈무리 2019), p.73.

[5] Jesper Juul, The Art of Failure: An Essay on the Pain of Playing Video Games (The MIT Press, 2013),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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