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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Jan 07. 2022

덕임이의 빈호는 정말 정조가 정했을까?

옷소매 붉은 끝동 16화

폭풍처럼 전개된 '옷소매 붉은 끝동' 16화, 17화는 이미 역사적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폭풍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서상궁 마마님이 덕임이를 보낸 후 다시 후궁을 간택해야만 했던 산이 이야기를 하는 부분은 혹시나 앞으로 눈물이 필요할 때가 있다면 바로 떠올려 눈물버튼으로 쓸 수 있을 정도다. 


짧지만 달콤했던 덕임이의 후궁시절, 산이가 덕임이를 위해 빈호(嬪號)를 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옷소매 붉은 끝동 16화 중
산: '의가의실(宜家宜室)' 이라는 말을 아느냐? 
덕: 부부가되어 화목하게 지낸다는 뜻이옵니다.
산: '의가지락(宜家之樂)' 이라는 말도 아느냐?
덕: 부부 사이의 화목한 즐거움을 이르지요.
산: 그게 바로 내가 너에게 주는 '의(宜)'자다. 말했지않느냐. 난 너와 가족이 되고 싶다고. 
덕: '의(宜)'자 에는 좋아한다는 뜻도 있지 않습니까?
산: 알면서 뭘 묻지?


'알면서 뭘 묻지?' 라니.. 남편한테 연습을 시켜서 자기 전마다 듣고 싶은 달달함이다. 


마땅하다는 뜻의 '의(宜)'가 부부 사이의 화목함을 표현하는데 쓰이게 된 이유는《시경(詩經)》에 있다. (역시 작가님께서《시경》을 잘 아시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의 의(宜)는 친밀하여 사이가 좋다는 '친선(親善)'과 온화하고 순하다는 '화순(和順)'의 뜻으로 풀이 된다. 불타는 사랑의 감정을 지나 더욱 친밀한 가족의 관계가 되었기에 잘 어울리는 글자다. 


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 

도지요요 작작기화 지자우귀 의기실가 

어여쁜 복숭아나무여, 활짝 핀 그 꽃이로다. 

이 아가씨 시집감이여, 그 집안을 화목하게 하도다. 


桃之夭夭 有蕡其實 之子于歸 宜其家室 

도지요요 유분기실 지자우귀 의기가실

어여쁜 복숭아나무여, 무성한 그 열매로다.

이 아가씨 시집감이여, 그 집안을 화목하게 하도다. 


桃之夭夭 其葉蓁蓁 之子于歸 宜其家人 

도지요요 기엽진진 지자우귀 의기가인

어여쁜 복숭아나무여, 무성한 잎이로다.

이 아가씨 시집감이여, 그 집안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도다. 

《시경》도요(桃夭)


이 시가 여인이 시집을 가서 화목한 집안을 만든다는 내용이기 때문에 시에 나오는 글자들을 따서 '의가의실(宜家宜室)'과 '의가지락(宜家之樂)'과 같은 말을 부부의 화목함을 표현할 때 인용하여 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산이 덕임을 위해 손수 '의(宜)'자를 골라서 빈호로 삼았을까? 

답은, 그렇다. 《일성록(日省錄)》정조 7년 (1783) 2월 19일 기사에 그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신하1: 소용(昭容)에게 올릴 작호(爵號)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정조: 이 또한 대신들로 하여금 정하게 하라.
...
신하2: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태(泰), 유(裕), 흥(興), 수(綏)라는 글자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정해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정조: 의(宜) 자로 하라. 
...

대신들에게 정하라고 해서 좌의정과 우의정이 기껏 의논해서 여러개 정해왔더니, 그 중에서 고르지 않고 대뜸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상사라니. 이럴거면 처음부터 정해주지 그러셨습니까 전하.. 라는 대신들의 마음의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다. 


정조도 당연히 '의(宜)'에 화목한 가정의 뜻이 있음을 알고 정했을 것이다. 물론 드라마 처럼 알콩달콩 앉아서 덕임이에게 먼저 알려주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참고로 소용(昭容)은 품계를 말하는데 문효세자를 낳았을 때 후궁으로 정3품에 해당하는 소용의 품계를 받았었다. 품계를 받았기 때문에 걸맞는 빈호도 뒤이어 하사 해 준 것이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 으로 삼는다.
後宮有娠, 然後封爵, 旣有受敎, 成氏爲昭容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조 6년(1782) 9월 7일


다른 정조의 후궁들은 덕임이 같이 승은을 받은 후궁이 아니라 간택되어 들어온 양반가의 자제들이었기 때문에 간택 될 때 빈호(嬪號)를 미리 받고 들어왔다. 관청에서 알아서 정했고 정조가 직접 정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봐서 손수 호를 정해 준 건 실제로도 덕임이 뿐이었던 듯. 


사랑해서 가까이 두고 싶었지만 그랬기에 빨리 떠나보낼 수 밖에 없었다니, 가늘고 길게 가고 싶었던 덕임이에겐 너무 가혹한 사랑의 결말이었다. 이후 간택 된 수빈 박씨(綏嬪 朴氏)가 낳은 순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에 이후 세도정치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만일 문효세자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나서 왕위를 이었다면 조선 후기의 역사는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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