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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Feb 09. 2022

추사 김정희 말고 또 누구?

'한국서예' 전시도록 구입기

한문 영인본 서적을 사러 청계천 부근의 헌책방에 갔었다. 일반 서점에서는 보기 어려운 오래 된 한학(漢學)과 서예(書藝) 관련 서적이 많아 흥미롭게 이것저것 뒤적이던 중 198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간한 ‘한국서예’ 전시도록이 눈에 띄었다. 작품을 살펴보니 석봉 한호(石峯 韓濩),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처럼 서예로 워낙 잘 알려진 분들의 글씨 뿐 만 아니라 정조, 성종 등 임금의 어필과 이산해, 허목, 김홍도 등 이름이 익숙한 분들의 글씨도 많이 실려있었다. 조선의 이름난 서예가라고 하면 추사 김정희와 석봉 한호 외에는 떠오르는 이름이 없던 터에 귀한 목록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 얼른 집어들었다. 

물론 박물관 소장품이기 때문에 온라인에서 찾아볼 수도 있는 작품들이겠지만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모르면 검색을 할 수도 없고, 또 작품들이 워낙 많기에 학예사들께서 고심하여 고르고 골라 정했을 목록 자체만으로도 일타강사의 족집게 강의와 다름 없다. 게다가 이 당시의 박물관장님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쓰신 최순우 선생님이시니 그 심미안이야 믿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서예를 오래 했으면서도 조선의 서예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서예를 배울 때 교과서처럼 따라 쓰는 교본이 주로 중국의 서첩인 것이 크다. 물론 한문이 중국에서 나왔으니 그 기원이 되는 원형을 공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서(隸書)는 2세기 후한(後漢) 시대, 행서(行書)는 4세기 동진(東晉) 시대, 해서(楷書)는 6세기 북위(北魏) 시대의 비석에 새겨 놨던 글씨를 따라서 배우는 경우가 많다. 맛집을 가더라도 이왕이면 '원조'를 찾아 가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이야 한문 자체가 경시되고 있는 터라 서예는 더욱 더 고루한 취미로 생각되기에 '원조'만 따르기에도 벅차지만, 한문과 붓이 전부였던 옛날에는 좋은 글씨체-폰트-를 구하여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에 백제 사신이 본고장에 출장을 가서 최신 유행 글씨를 구하던 일화가 실려있다.  


백제국의 사신이 중국 수도(건업建鄴)에 글을 구하려 와서 부임지로 떠나려던 자운을 만났다. 배가 막 떠나려 할 때 사신이 물가에서 살피고서 30보 떨어진 곳에서 배를 바라보고는 절을 하며 다가왔다. 자운이 만나보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시중 어르신께서 쓰신 편지 글씨의 아름다움이 멀리 바다 밖에 알려졌기에 오늘 직접 쓰신 글씨를 구하였으면 합니다.” 하였다. 자운이 이에 배를 3일간 멈추고 30장의 글을 써서 주고 수백만금을 받았다. 

百濟國使人至建鄴求書 逢子雲爲郡 維舟將發 使人於渚次候之 望船三十許步 行拜行前 子雲見問之 答曰 侍中尺牘之美 遠流海外 今日所求 唯在名迹 子雲乃爲停船三日 書三十紙與之 獲金貨數百萬.

『남사(南史)』


백제 사신이 남조 양(梁)나라에 갔다가 명필로 소문난 소자운(蕭子雲)의 글씨를 구했던 일화이다. 부푼 마음을 안고 출장을 갔는데 하필이면 글씨를 받고 싶은 사람이 조만간 먼 길을 떠난다기에 부리나케 나루터로 달려가 떠나려는 배를 멈춰 세우고 글을 요청했을 사신의 긴박한 심정이 느껴진다. 이러한 배움의 열정이 백제의 화려한 문화의 원동력이지 않았을까. 


고려 말에는 충선왕이 아예 북경에 ‘만권당(萬卷堂)’을 만들어서 당시의 유명한 중국과 한국의 학자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 당시 교류했던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趙孟頫)는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다시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의 호에서 이름을 딴 송설체(松雪體)가 이후로 조선 시대에도 크게 유행했다. 안평대군의 글씨도 송설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처럼 원조 맛집의 인기가 오래도록 두터웠기 때문에 우리동네 맛집까지 섭렵하기는 쉽지 않았고, 요즘 와서는 취미로도 서예가 그다지 인기 분야가 아닌 탓에 서첩 한권을 온전히 마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글씨를 엑기스처럼 모아 둔 전시도록의 존재가 더욱 반가웠다. 

왼쪽부터 이광사, 영조, 윤순거, 정조의 글씨들

이 도록은 그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어지러웠던 1980년에 전시가 기획되어 크게 회자 되지 못한 슬픈 전시의 기록이기도 하다.(때를 잘못 만나 불운했던 서예 특별전) 그나마 서예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던 그 당시에 조차 부흥의 불씨가 되지 못하고 맥없이 꺼져버렸으니 말이다. 서예를 통해 한문에 익숙해지고 나아가 고전과 역사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면 인문학을 배우는 좋은 발판이 될 수 있음에도 날이 갈수록 뒷방으로 밀려나고 있어 안타깝다. 


도록의 여러 작품 중 비운의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를 소개해 본다. 노론이 득세했던 시절 소론의 사람으로 수십년의 귀양살이를 하며 글씨 연구에 힘을 바친 분으로 서예 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쓰기도 했다. 당시 이미 명필로 알려져 있었지만 후대에 추사 선생 때문에 더욱 이름이 오르내렸다. 칭찬이 아닌 악평으로. 이미 돌아가신 분이었기에 두 사람이 직접 만나 얼굴 붉힐 일은 없었지만 후대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추사’의 비판이 있었기에 설령 그의 글씨를 좋아했어도 안목을 평가절하 당할까 마음껏 좋다고 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대엔 화제성 1위 '미친 초서’ 이광사, 후대의 '넘사벽’ 추사에게 욕먹은 까닭)

(좌) 추사 김정희 행서 (우) 원교 이광사 행서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www.museum.go.kr ]

추사의 이 작품은 도록에 나온 것은 아니나 박물관 소장품 중 원교의 작품과 비교하기 좋은 듯 하여 골라보았다. 추사의 글씨에 비하면 원교의 글씨는 획의 두께에 큰 변화가 없어 심심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위적인 화려한 꾸밈을 없애고 질박함을 추구하는 자신의 학풍을 글씨에 온전히 나타내려 했기에 균일하고 힘있게 그어 나간 획들이 또한 온화한 느낌이 있다. 


추사나 원교 모두 옛 것을 배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였지만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달랐던 모양이다. 정치 성향도 그래서 반대였을지도. 하지만 현재 서예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점점 잊혀가는 중에 이것이 낫다 저것이 낫다 하며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사치이고 시간 낭비일 수 있다. 남아 있는 것 중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글씨가 없다. 개성이 중요시되는 때이니 만큼 다양한 글씨를 보며 자신의 취향대로 마음껏 아끼고 자주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저 다행일 것이다. 


草合路如線 초합로여선

偶隨樵子行 우수초자행

林間遇磐石 임간우반석

小憩看春耕 소게간춘경

- 陸游(1125-1210, 南宋)

풀이 우거진 길이 실처럼 이어져 

우연히 나무꾼을 만나 따라갔네 

숲 속에서 널다란 돌을 만나

잠시 쉬며 봄 밭갈이를 바라보네 

-육유(陸游), 남송 시대 시인 / 이광사 씀



青李來禽寫未閒 청이래금사미한

又將墨法畫溪山 우장묵법화계산

疎雲古木蒼蒼筆 소운고목창창필

猶在龍跳虎臥間 유재용도호와간

- 沈周(1427-1509, 明)

왕희지의 서첩도 모사할 겨를도 없는데  

또한 묵법으로 산수를 그렸네 

성긴 구름과 오래 된 나무의 무성한 필치는 

여전히 용이 뛰고 범이 누워 있는 중에 있도다. 

-심주(沈周), 명나라 시인 / 김정희 씀


*이 작품은 번역된 자료를 찾지 못해서 임의로 풀어보았다. 왕희지의 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문인듯 보인다.  

1) 청이래금(青李來禽): 왕희지의 서첩인 《여촉군수주서첩(與蜀郡守朱書帖)》의 별칭

2) 용도호와(龍跳虎臥): 용도천문, 호와봉각(龍跳天門, 虎臥鳳闕)의 줄인 말. 남조(南朝) 양(梁)나라 원앙(袁昻)의 《고금서평(古今書評)》에서 왕희지의 필법을 설명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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