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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Apr 05. 2022

생애 첫 문집 번역을 기념하며

《안락당집》에서 만난 김흔과 형제들

"'梅溪亦曰吾輩作詩에 未免脂粉이나 如公은 眞骨髓也라 하다.' 매계도 말하기를 '우리들이 시를 지을 때는 형식만 화려하게 꾸밈을 면치 못하지만 공의 경우는 참으로 골수를 체득하였다.'라고 하였다."

"원문은 물론 골수(骨髓)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비슷한 뜻으로 좀 더 쉽게 정수(精髓)를 얻었다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네, 수정하겠습니다." 

..

"'浴于溫陽에 下書監司하시어 發丁輿歸하니' 이 부분에서 장정을 징발한 일과 가마로 돌아갔다는 일은 별개의 일로 봐야 하는 건가요?"

"가마를 지고 갈 장정을 징발했다는 내용이니까 연결해서 보는 게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


일주일에 한 번씩 교수님과 번역 실습을 하는 날이다. 학생들이 번역한 내용을 검토해 주시면서 잘못된 번역이나 어색한 표현을 수정해 주시고 조원들끼리 미리 스터디하면서 의문이 있었던 부분도 질문하면서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는 시간이다. 


한문 공부를 시작하며 목표로 삼았던 연구과정에 합격한지도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주로 경서와 사서를 익히며 한학의 기초를 다지는 연수과정과는 달리 연구과정에서는 번역 실무를 체험한다. 한 문집의 일정 부분을 3~4명이 한 조가 되어 공동 번역을 하는데 연말에는 계약된 번역 분량만큼 번역비를 지급받기도 한다. 물론 실제 번역 과제와 마찬가지로 성과 평가실의 품질평가를 통과한다는 전제 아래! (초보이고 공동번역이라 시급으로 따지면 눈물이....) 


기념비적인 나의 첫 실습 문집은 안락당집(安樂堂集)》이다. 선배들이 앞부분을 맡아 번역했고 우리 조에서 뒷부분을 이어받아 마무리하는 중이다. 보통 문집의 앞부분에는 저자의 시문, 상소, 편지글 등 직접 지은 글들이 실려 있고 뒷부분은 저자의 행적을 기억하기 위한 동료, 친우, 가족들의 글이 실려있다. 뒷부분을 맡은 우리는 저자인 안락당 김흔(金訢, 1448~1492)의 가족사와 동료들이 전하는 그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어떤 친구들과 교우를 했는지 등의 내용을 번역 중이다.  


지금은 출판되는 책들의 저자를 직접 만나볼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문집'은 저자가 죽은 후에 간행된다. 물론 문집을 만들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모아놓기도 하고 글을 잘 짓는 지인에게 문집 앞머리에 넣을 서문을 부탁해 받아놓기도 하지만 자신이 직접 문집을 간행하는 일은 없었다.  


금속활자의 기원을 따지며 인쇄기술의 우열을 점치는 것을 보면 활자로 찍어내는 것이 더 있어 보이지만 금속활자는 목적 자체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책을 소량으로 찍기 위한 것이라 개인이 쓸 수도 없을뿐더러 활자판은 한 번 쓰고 나면 헐어버리기 때문에 오래 남길 수가 없다. 목판으로 새겨서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찍어낼 수 있도록 개인의 문집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공이 많이 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선비의 로망이었다. 게다가 돈이 있고 모아놓은 글이 있어도 명망이 없으면 사후에 아무도 일을 추진해 주지 않고, 아무리 명망이 있었더라도 추진을 해 줄 만한 능력 있는 후손이나 제자가 없으면 또 잊히고 만다. 


지금 보고 있는 안락당집 은 저자인 김흔이 죽고 21년 후에 막내아들인 김안로가 서른 살 무렵 간행 한 아버지의 문집이다. 사실 김흔은 십 대의 어린 아들 셋을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서 큰아버지였던 김심(金諶)이 데려다 키워주었는데, 이 문집을 낼 무렵은 그 소년들이 장성하여 한 명도 두 명도 아닌 세명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위세가 대단했을 때다. 막내 안로는 1506년 무려 장원급제를 하고, 삼 년 뒤인 1509년 두 형들도 함께 급제를 했다. 당시 얼마나 거드름을 부렸는지 실록에도 그 사실이 남아 있다.  


안로는 본디 서울 사람인데 종[]이 영천(榮川)에 있으므로, 농장(農庄)이 있다고 핑계하여 그 어머니를 그곳에 옮겨 두고, 각 고을의 뇌물을 달게 받아먹으며 여러 달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 뒤에 형 김안세(金安世)와 김안정(金安鼎)이 모두 과거에 올라 세 사람이 한꺼번에 모친을 뵈러 가니, 명성(名聲)이 떠들썩했다. 사람들이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선물을 보내는 것이 낭자(狼藉)했는데, 꿩이나 닭 같은 미미한 물건도 모두 포(脯)를 만들어 집으로 보내고 이웃 사람에게 주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그가 세상 공론도 아랑곳하지 않고 염치없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

 중종실록 3년 1월 20일


아... 문집을 번역하며 쌓아왔던 그 가족에 대한 내적 친밀감이 무너지는 기분이지만, 다행히 김안로 삼 형제에 비해 문집의 주인공인 아버지 대의 삼 형제 김심, 김흔, 김전(金詮)은 똑같이 셋 다 급제를 해서 요직을 거쳤지만 나름대로 청렴한 명망을 유지했다.  중종시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다 결국 유배되어 사사된 김안로를 생각하면 선대의 청렴한 유풍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어쨌거나 성공한 뒤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길이 남기기 위해 이분 저분 찾아다니면서 아버지의 행적을 전해 듣고 소중히 기록하던 마음 만은 여느 자식과 다름없는 효심이었을 것이다. 특히 아버지의 통신사행 관련 에피소드는 문집 여기저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상 깊은 이야기였나 보다.  먼 옛날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태연히 시를 읊던 출중했던 선비 김흔과 조선판 엄친아 같던 그 형제들을 알게 되어 즐거웠다.


일찍이 일본 통신사의 서장관을 선발할 적에 사람들이 모두 위험하게 여겼으나 중씨는 난처한 기색이 없었다. 바다에서 바람과 큰 파도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하자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여 울부짖었으나 그만 홀로 단정히 앉아 시를 읊조리며 태연자약하였다. 

嘗選日本通信使書狀官할새 人皆危之나 仲無難色이라 在海洋遇風濤하야 死僅一髮하니 舟中皆蒼黃叫號나 獨端坐하야 吟嘯自若이라 


 다음 번역에선 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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