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교육원 연구과정 합격 수기
터덜터덜 마음이나 비울 겸 운동을 하러 가는 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발표 난거야?"
"응....." (극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더 차분하게 뜸들이는 남편)
"........" (나는 심장이 덜컹)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정말? 붙었어???" (아오! 진짜 떨어진 줄 알았잖아)
좋은 소식을 듣고도 눈물이 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분주한 길거리에서 흑흑거리며 울었다. 그동안 꾹꾹 담아놓았던 부담과 불안이 해소되면서 고생한 나 자신에 대한 위로가 쏟아져 나와 그랬던 것 같다.
작년 이맘때엔 전화로 정반대의 소식을 들었었다.
"발표 났는데....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네."
아직도 전화기 너머의 안타까움과 차분함이 동시에 묻어있던 남편의 목소리가 생생히 기억난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발표가 나는 사이트를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있는 나 대신에 새로고침을 계속하며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을 남편에게 고마우면서도 좋은 소식을 들려주지 못한 미안함이 컸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다시 시험을 준비했다.
시험 보기 전 일주일 정도는 모르는 문제가 나올까봐
시험 보고 난 일주일 동안은 답을 틀리게 적었을까봐
그래서 혹시 또 떨어지면 어쩌나 싶어 하루하루가 걱정의 연속이었다.
살면서 입시도, 취업도 단번에 뚫어 인생에 재도전이 없었는데 첫 재수를 경험해 보니 새삼 삼수, 사수를 했던 대학 동기들이 어린 나이에 대단했구나 싶고, 수년간 고시 준비를 하는 이들도 존경스러워진다. 나는 단 1년도 이렇게 버거운데.
연구과정 입학시험은 사서삼경-《논어》,《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주역》-과 산문집인 《고문진보》, 역사서인 《통감절요》가 출제 범위이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한 각종 한국의 문집과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응용문제가 3문제 정도 나온다. 글짓기만 없다뿐이지 현대판 과거시험이 따로 없다. 그리고 모든 문제가 다 ‘번역하기’ 이다. 객관식은 없다.
제출범위가 워낙 넓다 보니 모든 내용을 다 알고 푼다는 것은 무리다. 예를 들어 《시경》은 꼭 한 문제씩은 출제가 되는데 적게는 3장(章)에서 많게는 8장까지도 이루어지는 총 300여 편의 시-총 1,134장이라는 통계가 있다.-에서 딱 한 장이 출제된다. 연수과정 때 100여 편 정도를 배우는데 작년 입학시험에서는 안 배운 부분에서 출제가 되는 바람에 생전 처음 보는 글귀를 접하곤 망연자실했었다.
民亦勞止汔可小康惠此中國以綏四方無縱詭隨以謹無良式遏寇虐憯不畏明柔遠能邇以定我王
쉬는 시간에 시험 보러 온 동기들과 서로 “그 문제 뭐였어? 어디서 나온거지?”하며 허탈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출제 범위에 비해 시험 시간의 제약으로 소박할 수 밖에 없는 문제의 갯수 때문에 많이 공부한 사람도 적게 공부한 사람도 결과가 ‘모름’으로 같아지는 비극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불안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지금 보고 있는 이 부분이 나올 확률보다는 안 나올 확률이 훨씬 더 크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보지 않을 수는 없는, 그리고 시험에 떨어진다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옛 책들에 나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건 아닌지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이 나곤 했다.
하지만 이건 숫자판 위에 작대기를 올려놓고 번호를 뽑아 겹치는 부분에 따라 설탕 과자를 주던 ‘대왕잉어 뽑기’와 비슷하다. 내가 해야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드넓은 판 위에 가능한 내가 올려 놓을 수 있는 작대기를 많이 확보해서 당첨 확률을 높이는 것 뿐이란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올해 시험에는 작년에 나를 당황 시켰던 것 같은 초면의 《시경》 구절은 없어서 대충 구색은 맞춰 답안을 쓸 수 있었다. 구면이지만 친분은 없어서 아는 척하기 좀 어렵긴 했지만. 하지만 자신 있었던 《통감절요》에서 느닷없이 처음 보는 내용이 나와서 헤맨 바람에 합격 발표가 나기 전까지 불합격의 불안을 피워내는 좋은 연료가 되어주었다.
연수과정에서 배운 범위 밖의 문제가 출제되는 것에 대한 교수님들의 입장은 단호하시다.
“문장의 이치를 따져보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반박할 수도 없는 말이라 이치를 따지기는 커녕 아는 것만 쓰기도 바쁜 수험생은 그저 속으로 억울함을 삭일 수 밖에.
하지만 결국 번역을 잘할 수 있느냐를 판단하는 진검 승부는 ‘응용문제’에서 판가름이 난다. 배점도 크다. 삼경 전체에서 나오는 2문제의 배점이 25점인데 응용문제 한 문제가 25점이다. 시험의 목적 자체가 이런 응용문제에 나오는 글을 번역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고,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이유도 선조들의 글 곳곳에 다빈치 코드마냥 숨겨져 있는 속뜻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 크니, 사서삼경을 모두 외웠다고 해도 응용문제를 못 풀면 소용이 없다.
응용문제를 대비해서는 별도로 연수과정 3학년 때부터 스터디를 했다. 시험을 준비하는 연수과정 학생들을 위해 연구과정의 선배들이 함께 참여하는 스터디였는데 연구과정의 선배들 두셋, 연수과정 학생 예닐곱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그중 매년 한두 명의 합격자가 나왔고 올해는 나야 나! 연수생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보은을 위해 이제는 연구생으로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다. 내년에 그 중에서 합격자가 나와 스터디를 물려 줄 수 있기를.
스터디에서는 한국문집의 산문-기문(記文), 발문(跋文), 서찰(書札) 위주-을 문장부호 없이 한문만 있는 상태인 백문(白文)으로 번역해보고 서로 교정을 해 준다. 시험에 나오는 형태와 같은 백문을 보는 건 의미 단위로 구두(句讀)가 끊어져 있는 글을 보는 것과 큰 차이가 난다. 어렵고 답답해도 꾸준히 백문을 보며 익숙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연구과정에서는 구두를 끊는 것뿐 아니라 끊어진 구두에 인과, 역접, 병렬, 보충 등 문장을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현토(懸吐)를 붙이는 것까지 고려해야 해서 더 머리를 싸매고 공부 중이다.
이렇듯 고생을 자처하는 까닭은 이 연구과정을 마치면 번역위원이 될 수 있고 고전번역원의 번역사업에 참여할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전번역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 물론 이 업계는 –아직은- 부귀함과는 거리가 가깝지 않은 편이라 일단은 늦은 나이에 그저 고전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에서 시작해 직업인의 길에 오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다. 게다가 한문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멸종 위기의 글종자가 되길 자처한 특이한 취향의 동기들을 만났다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문명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을 한문쟁이들만 알 수 있는 농담으로 낄낄거릴 때가 얼마나 재밌는지. 말해도 머글은 모를테니 여긴 적지 않으련다.
교수님들께서 늘 연구과정 2년을 보람차게 보내라고 말씀하신다. 걱정 없이, 그리고 원 없이 공부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이고, 이때 공부하는 것들이 향후 십수 년 번역일의 바탕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 말씀을 새겨듣고 하루하루 분음(分陰)을 아껴가며 공부 중이니 상유수습(桑楡收拾)의 공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
P.S
시험의 운이라는 건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다.
망망대해 같은 시험 과목들을 공부하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글감으로 쓸까 싶어-‘시험 떨어지면 뭐 먹고 살지’ 프로젝트의 일환이기도 했다.- 저장해 두곤 했다. 그 중 《맹자》에서 뽑아 놓은 것은 딱 한 부분 뿐이었는데, 그 문장이 이번 시험에서 딱 하나 뿐인 《맹자》 문제로 나왔다.
내가 2022년 연구과정에 합격할 상인가.
人能無以飢渴之害爲心害, 則不及人 不爲憂矣.
사람들이 기갈의 해침으로 마음을 해침이 되지 않게 할 수 있으면 <富貴가> 남에게 미치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