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오늘도 괜찮아

덤덤했던 12월 31일 밤을 기억하며

by 옛글나눔




除夜, 次高達夫韻
섣달그믐, 고달부의 시에 차운하다

아이들 둥글게 모여 잠들지 않으려 애쓰고
마당 화로에 술 끓이며 모두 시끌벅적하는구나.
이 늙은이 조용히 앉아 감흥이 없으니
내일 해를 더함은 남은 해 줄어드는 것이라네.

兒女團欒強不眠(아녀단란강불면)
地爐烹酒共讙然(지로팽주공환연)
阿翁默坐無情緖(아옹묵좌무정서)
明日增年是減年(명일증년시감년)

-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



새해를 맞이하는 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오도카니 앉아 나이 먹어 감을 서글퍼하는 작자의 심정이 잘 느껴지는 작품이라 적어 두었었다. 보통 한 작품 안에서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잘 쓰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는 ‘증년(增年)’과 ‘감년(減年)’에 같은 ‘年’ 자를 쓰면서, 더해지는 것은 자연의 시간이고 줄어드는 것은 나의 시간이라는 대비가 돋보이게 사용한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默坐無情緖’.

2025년 12월 31일을 보내는 내 마음이 딱 이랬다. 추위를 무릅쓰고 보신각에 직접 나가 타종 행사를 보는 열정은 원래도 없었지만, 보신각 앞을 생중계하는 방송을 보며 케이크에 초도 켜고, 와인도 한잔 하며 새해 카운트다운에 가슴이 콩닥대는 작은 열정은 있었는데. 왠지 이번에는 2025년 12월 31일이 2026년 1월 1일이 되는 일이 12월 30일이 31일이 되었던 그 전날과 특별히 다를 것은 또 무엇인가 싶은 덤덤한 마음에 밤 11시쯤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맞이한 2026년 1월 1일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숫자가 주는 시각적 안정감을 선사하고 자비 없이 다른 날과 같은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감흥 없이 덤덤했던 이유가 오도카니 앉아 여생이 줄어듦을 서글퍼했던 저 시인과 같은가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옹(阿翁)이라 불리며 가는 해가 아쉬운 어르신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니.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떤 하루가 주는 특별함은 그 날짜가 가지는 고유함 때문이 아니라 직접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경험이 쌓여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1월 1일 정동진 일출을 보기에는 열정이 부족해서 1월 2일 정동진의 일출을 보러 떠났지만 하루 차이의 해는 그 해가 그 해였던 것과 같은 경험 말이다. 갑절이었던 숙박비가 정상화가 되었다는 장점도 더하여.


새해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기 십상인 사람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음력설이 다가오고 있다. 1월 1일에 첫 문장을 썼지만 결국 끝내지 못한 이 글이 내내 생각났기에 두 번째 기회를 잡기로 하고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았다. 그렇다고 어찌어찌 완성한 글을 굳이 음력설을 기다려 올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비록 마음먹은 날에 완성하지도 못했고, 양력 1월 1일도 음력 1월 1일도 아닌 애매한 날짜이지만 글이 완성된 오늘이 중요하니까.


photo_2026-02-11_16-21-47.jpg 그 해가 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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